프랑스 희극 ‘장 주네’ 와 ‘하녀들’ 예술공간 '오르다'에서 공연

- 2015년 7월 21일 ~ 7월 26일 공연

송혁수 기자 | 기사입력 2015/07/18 [20:51]

프랑스 희극 ‘장 주네’ 와 ‘하녀들’ 예술공간 '오르다'에서 공연

- 2015년 7월 21일 ~ 7월 26일 공연

송혁수 기자 | 입력 : 2015/07/18 [20:51]
▲     © 송혁수 기자

<하녀들>은 프랑스 빠뺑 자매의 살인 사건이 그 배경이 되었다. 한 집안의 하녀들이었던 빠뺑 자매는 자신들의 여주인과 딸을 잔인하게 살해한 후 경찰에게 체포되었는데 작가 장 주네는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하녀들>을 탄생시켰다.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버림받아 고아원에서 자란 장 주네는 작가로서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지만 천한 자신의 태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평생의 절반을 감옥에서 지낸 그는 천재작가와 고아라는 신분 사이를 배회하며 어느 한 곳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고독한 주변인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에서 <하녀들>에 등장하는 쏠랑주와 끌레르는 한편으로 그의 분신으로 보인다. 하녀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여주인을 증오한 나머지 그 애인을 밀고하는 편지를 쓰고, 한편으로는 그녀를 독살하려는 계획까지 품는다.

그러나 동시에 하녀들은 연극놀이를 통해 마담을 흉내 내고, 또 그녀의 애인을 연민하며 그들의 처지를 탐하는 연극 놀이에 빠진다. 결국 여주인을 독살하려는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마담역할을 하는 끌레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게 된다. 그녀들은 서로를 자신의 거울이라고 말하는데, 그 거울은 애정과 연민의 거울이며, 동시에 천하고 속물적 한계를 지닌 추악한 자신을 들여다보는 끔찍한 거울이다.

▲     ©송혁수 기자
<하녀들>이 부조리 계열의 작품이면서도 대중의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무대 위 하녀들이 지니는 이중적 의식 구조와 한계를 들여다보는 장 주네의 시각과 철학에 인간적으로 공감하는 바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훌륭한 작품은 그 자체로 작가의 거울이 되고, 재해석과 형상화를 통해 펼쳐지는 무대 위 환영은 관객의 거울이 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연극이라는 장르는 초첨단 과학 시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대인들에게 매력적인 도구이며, 인간의 의식구조를 들여다보고 탐할 수 있는 효과적인 아날로그가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 주네의 <하녀들>도 그 반열에서 유효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시대를 관통하는 인간적 고민과 성찰의 무늬가 반짝이고 있음에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작품의 의도
이 연극은 원래 극장이 아니라 카페나 스튜디오처럼 저비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 활용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 그래서 지난 겨울 우리의 공연이 처음 탄생된 곳은 종로구 원서동의 작은 복합공간(스튜디오 나노)이었다.

극장들이 즐비한 대학로에서도 높은 대관료로 많은 연극인들이 자신들이 추구하는 작품을 제대로 구현할 수 없는 현실, 그래서 최소한의 공간으로도 작품의 내용과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도록 나름 저비용 고효율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또한 기존 텍스트가 가진 주제를 이끌어내면서도 극의 흐름과 내용이 좀 더 쉽게 이해될 수 있도록 다듬었다. 결국 우리가 표현하고 이해하고 싶은 궁극적 대상은 장 주네가 아니라 여전히 부조리한 세계와 우리 자신이니까. 우연인지 필연인지 좀 더 넓은 극장으로 옮겨왔다.
 
▲     ©송혁수 기자
우리는 현실에서의 두 하녀와, 그녀들이 극중에서 연기하는 마담과 하녀의 모습을 잘 이해시키기 위해 시선처리의 활용에 주목하였다. 극중극 상황에서는 대부분 시선을 관객석 쪽으로 향하며, 현실로 빠져나올 때는 서로가 시선을 주고받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관객이 상황을 좀 더 쉽게 받아들이도록 계산하였다.

그리고 큰 동선을 자주 이용하기보다는 테이블 주위에서 풍부한 표정과 몸짓, 적절히 소품을 활용한 연기를 통해 관객이 무엇보다 인물의 상태와 섬세한 변화에 관심과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의도하였다.

무대는 테이블과 의자 세 개, 전화기, 시계, 보석함, 거울이 있으며, 그것들로 거의 모든 극적 상황을 표현하였다. 극중극을 할 때 효과적으로 사용되는 공간은 바로 테이블이다. 무대가 품고 있는 테이블은 배우와 관객이 만나는 판타지이다.

그것은 하녀들이 꿈꾸는 욕망의 놀이공간이기도 하며 마담이 하녀들을 조롱하고 착취하는 공간으로 변하는 확장성을 가진다.

또한 그녀들이 입고 있는 의상은 비극적 상황과 내면의 결핍이라는 들실과 날실로 이루어진 욕망과 껍데기에 불과하며, 그녀들 스스로가 고급 드레스라고 일컫는 것도 결코 그녀들을 보호하지도 못하고 감추지도 못하는 허상에 불과한 것이다. 초연 때 모든 음악은 키보드 라이브로 연주되었다.

▲     © 송혁수 기자
더불어 전화기 소리나 자명종 시계 소리 등 음향효과도 피아노 건반 소리로 표현되었는데 무대와 배우들의 연기나 움직임과 적절한 조화를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빛과 소리, 촉감 등 모든 감각은 개별적이고 주관적인 것이다.

그것들은 무대라는 공간에서 상징적 합의만 이끌어내면 고도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이번에는 콘트라베이스가 친구가 되었다. 인간 내면의 소리를 무겁게 끌어올리는 듯 한 그 소리가 배우들의 소리와 몸짓과 얼마나 어울릴지 궁금하다. 고민한다.

모든 연극은 생명이다. 우리 각자가 연극이며, 우리 모두를 합한 것이 연극이며, 연극 아닌 것도 연극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생명은 생성만이 아니라 소멸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녀들을 죽임으로써 살아있는 것이 아닐까. 한 번 지나면 그 순간은 다시 올 수 없이 소멸하기에 아름다운 생명들... 우린 지금도 연극을 꿈꾼다. 우리의 공연은 그 위대한 궤도 위에 잠깐 스쳐 지나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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