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대마도 수선사와 '최익현'

조금제 독도지킴이 대한민국 대마도본부 본부장 | 기사입력 2016/09/13 [14:13]

[기고]대마도 수선사와 '최익현'

조금제 독도지킴이 대한민국 대마도본부 본부장 | 입력 : 2016/09/13 [14:13]

대마도를 방문하면 덕혜옹주 결혼봉축비와 조선통신사비를 거쳐 조금 길을 걷다보면 수선사에 모셔있는 ‘최익현 순국비’를 만나볼 수 있다.


구한말 대유학자이자 구국 항일투쟁의 상징인 최익현 선생은 대마도에 유배되어 왜놈이 주는 음식은 먹지 않겠다하여 굶어 죽었다 한다.

▲ 조금제 독도지킴이 대한민국 대마도본부 본부장     ©시사우리신문편집국

장례는 백제의 비구니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수선사에서 치러졌으며 유해는 부산으로 이송되었다. 선생의 넋을 기리고자 1986년 유지들의 힘을 모아 수선사에 순국비를 세웠으며 비 뒤편에 누군가 심어놓은 무궁화 꽃이 선생의 애국정신을 뒷받침하고 있다.

수선사(修善寺)는 7세기 백제의 범묘스님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이 곳은 1907년 1월 1일 대마경비대 병영에서 서거한 면암 최익현 선생의 유해가 임시 안치되어 있었던 곳이다.신라 불상이 9.5cm 크기의 동조여래형 좌상이 있다.

최익현은 일본이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주권을 빼앗자 그는 전북 태인 종석산(鍾石山)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제자 임병찬을 찾아가 의병을 일으킬 것을 제의한다. 최익현의 명성은 전국에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흔연히 수많은 유생들과 백성들이 이들의 의병에 대거 합류하게 된다. 

최익현이 이끄는 의병대는 전북 일대 일본군을 격파하며 승승장구했다. 


10년 전 전봉준장군이 동학혁명을 일으켰다가 몰살을 당했던 고부가 바로 옆 동네여서 그동안 일본에 대한 원한이 사무쳤던 백성들이 대거 참여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러나 1906년 최익현이 체포되어 대마도에서 단식 끝에 사망하자 전국에 통곡소리가 그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열흘 만에 아들이 대마도에 가서 시신을 부산으로 모셔왔으며 선영이 있는 충남 예산까지 기차로 운구하는 데 흰 상복을 입은 백성들이 철로 양변에 도열하여 대성통곡하는 모습이 수백리에 걸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마도를 탐방하면 수선사의 최익현순국비 앞에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일본군에 항거하다 대마도에 잡혀갔어도 끝내 왜놈 음식을 거부하고 순국한 최익현 선생의 정신을 거울삼아 대마도를 탈환하는데 매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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