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용에 관해

악학궤범에 나오는 처용탈

김효정 칼럼리스트 | 기사입력 2011/07/25 [15:07]

처용에 관해

악학궤범에 나오는 처용탈

김효정 칼럼리스트 | 입력 : 2011/07/25 [15:07]
■ 처용암(處容岩)

종 목 :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4호

면 적 : 207,000 ㎡

소재지 : 울산광역시 남구 황성동 668-1

지정(등록)일 : 1997년 10월 9일

황성동은 숙종때 성외리와 황암이라 하던 마을이다. 이후 영조때는 성외와 황암으로 정조때는 성외, 황암, 세죽, 장암, 지동으로 갈라져 있다가 순조때 지동마을이 없어졌다. 고종때는 성외, 세죽, 개곡으로 1911년에는 다시 성외, 천곡, 세죽, 계곡, 황암으로 세분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이를 합하면서 황암의『黃』자와 성외의『城』자를 따서 황성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처용암은 세죽마을 앞바다 가운데에 놓여 있는 바위로, 처용랑(處容郞)과 개운포(開雲浦)의 설화와 관련이 있다.

『삼국유사』권2, 「기이2」처용랑(處容郞)과 망해사(望海寺)

『第四十九 憲康大王之代 自京師至於海內 比屋連牆 無一草屋.

笙歌不絶道路 風雨調於四時.

於是 大王遊開雲浦[在鶴城西南 今蔚州] 王將還駕 晝歇於汀邊 忽雲霧冥日臺 迷失道路.

怪問左右 日官奏云 “此東海龍所變也 宜行勝事以解之”.

於是束有力司 爲龍創佛寺近境.

施令已出 雲開霧散 因名開雲浦.

東海龍喜 乃率七子 現於駕前 讚德獻舞奏樂.

其一子隨駕入京 輔佐王政 名曰處容.

王以美女妻之 欲留其意 又賜級干職.

其妻甚美 疫神欽慕之 變爲人 夜至其家 竊與之宿.

處容自外至其家 見寢有二人 乃唱歌作舞而退.

歌曰 “東京明期月良 夜入伊遊行如可 入良沙寢矣見昆 脚烏伊四是良羅 二肹隱吾下於叱古 二朕隱誰支下焉古 本矣吾下是如馬於隱 奪叱良乙何如爲理古”.

時神現形 跪於前曰 “吾羨公之妻 今犯之矣 公不見怒 感而美之.

誓今已後 見畫公之形容 不入其門矣”.

因此 國人門帖處容之形 以僻邪進慶.

王旣還 乃卜靈鷲山東麓勝地置寺 曰望德寺 亦名新房寺 乃爲龍而置也.

又幸鮑石亭 南山神現舞於御前 左右不見 王獨見之.

有人現舞於前 王自作舞 以像示之.

神之名 或曰祥審 故至今國人傳此舞 曰御舞祥審 或曰御舞山神.

或云 旣神出舞審象其貌 命工摹刻 以示後代 故云象審.

或云霜髥舞 此乃以其形稱之.

又幸於金剛嶺時 北岳神呈舞 名玉刀鈐 又同禮殿宴時 地神出舞 名地伯級干. 語法集云 于時山神獻舞 唱歌云智理多都波都波等者 蓋言以智理國者 知而多逃 都邑將破云謂也.

乃地神山神知國將亡 故作舞以警之 國人不悟 謂爲現瑞 耽樂滋甚 故國終亡

제49 헌강왕대에 이르러 서울로부터 해재(海內:나라 안 각지)에 이르기까지 집들이 즐비하여 담장이 연이었는데 초가(草家)는 한 채도 없었다.

거리에는 악기소리와 노래가 끊이지 않았고 풍우(風雨:날씨)는 사시사철 골랐다. 대왕(大王)이 개운포(開雲浦) [학성(鶴城) 서남(西南)에 있으니, 지금의 울주(蔚州)이다]로 놀러 갔다가 돌아가려 하면서 대낮에 물가에서 쉬고 있는데 홀연(忽然) 구름과 안개가 끼어 어두워지고 바람이 불어 헤매다 길을 잃었다. 괴이하게 여겨 좌우(左右:신하들)에 물었더니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이것은 동해용(東海龍)의 조화(造化)인데 좋은 일을 하여 풀어야 합니다” 했다.

이에 당해관원(當該官員)에게 명(命)하여 용(龍)을 위하여 가까운 곳에 절(현 울주군 청량면에 그 터만 남아있다. 망해사지)을 짓도록 했는데 영을 내리자마자 구름이 걷히고 안개가 흩어졌다. 그러자 동해용(東海龍)이 기뻐하여 아들 일곱을 데리고 임금 앞에 나타나서 덕(德)을 찬양하고 춤을 추며 음악을 연주하였다. 그중 첫째 아들은 임금을 따라 서울인 경주로 와서 정사(政事)를 보좌(輔佐)하였는데 이름을 처용(處容)이라 하였다.

왕이 미녀로써 아내를 삼게 하여 그를 머물게 하고자 급간(級干)의 직(織)을 주었는데 그 처가 무척 아름다워 역신이 흠모한 나머지 사람으로 변하여 밤이 되면 그 집에 가 몰래 같이 잤다.  

어느날 처용이 밖에서 돌아와 두 사람이 자는 것을 보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물러나왔는데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

동경 밝은 달에 / 서라벌(지금의 경주) 밝은 달에

밤 이슥히 놀고 다니다가 / 밤들이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구나! / 다리가 넷이구나.

둘은 내해인데 / 둘은 내 것이지만

둘은 뉘 해인고? / 둘은 누구의 것인고?

본대 내해다만 / 본디 내 것이다마는

빼앗는 걸 어쩌리. /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오.

<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향가 14수 중 하나인 “처용가”> 

이때 역신이 모습을 나타내 처용앞에 무릎 꿇고 말하기를 “내가 공의 처를 탐하여 지금 범하였지만 공이 노여움을 보이지 않으니 감동스럽고 아름답습니다. 맹세코 이 이후로는 공의 모습을 그린 그림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했다.  

이로 인하여 백성들은 처용의 모습을 문에 걸어놓고 邪(사)를 물리치고 착한 일에 힘쓰게 되었다. 

왕이 서울에 환어(還御)하여 영취산(靈鷲山) 동쪽 기슭의 승지(勝地)를 택하여 절을 세우고 이름을 망해사(望海寺) 또는 신방사(新房寺)라고 하였으니 이는 용(龍)을 위하여 세운 것이었다.  

■「악학궤범」에 나오는 처용탈

처용을 어부, 불자, 화랑, 용자, 무당, 의무이면서 호국신의 아들, 지방호족의 자제, 이슬람 상인, 아랍-무슬림인, 용성국 변방족, 남방계 이민족, 일식신, 용신이면서 터주신, 여름의 상징, 민중의 상징적 인물, 의식, 춤을 상징하는 신 등으로 보고 있어 그야말로 천태만상이다.

예를 들어, 고대 사람들에게 있어서 현대와 같은 의료여건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기에 질병에 대한 공포가 심했을 것이다. 역신이 처용의 얼굴 그림만 봐도 문을 열고 들어가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부분에서 처용가는 이러한 설화를 배경으로 간직한 것으로 고대인의 질병퇴치를 위해 처용을 매개로 글이나 노래를 백성들에게 유포해 질병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게 하는 작용을 하여 민생안정을 꾀하려는 시도와 민간신앙으로 백성들에게 신성한 존재로 인식시켜 왕권을 강화하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혹은, 제정일치사회에서 분리되는 시대로 넘어가면서 왕권과 신권은 분리되었지만 서로의 힘겨루기에서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로 생각할 수도 있다. 왕권을 강화하거나 보좌하는 수단으로 司祭巫에 의한 왕권보좌는 고대신라의 기록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三國遺事』권제1 기이 제1 제2 남해왕조에

“金大問云 次次雄方言謂巫也 世人以巫事鬼神尙祭祀 故畏敬之 逐稱尊長者謂慈充”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아들인 제2대 남해차차웅의 이름 혹은 왕칭이 차차웅이다. 차차웅은 巫堂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憲康王이 신들의 왕이면 처용은 왕정보좌를 하는 巫堂이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처용은 용이면서 인간이다. 이러한 양면성을 설명할 수 있는 논리는 처용을 巫堂으로 보았을 때 가능할 것이다. 처용은 巫堂이면서 동시에 巫堂이 主神으로 모시는 神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으로 접근하면 헌강왕이 길을 잃은 상황에서 동해용의 도움을 얻어 문제를 해결하고, 그 용의 아들에게 왕권보좌를 시킴으로써 자연스럽게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이 숨어있다고 할 수 있다.

헌강왕은 용을 모시는 동해 쪽의 유력한 무당인 처용에게 왕권보좌의 역할을 시킴으로써 백성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려는 의도가 숨어있었을 것이다. 용을 모시는 유력한 무당을 왕권을 보좌하게끔 한다는 것은 곧 백성들에게 큰 안도와 안정을 주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왕권을 강화하기에 더없이 좋았을 것이다.

이외의 더 많은 해석이 있다 보니 처용을 두고서 천의 얼굴을 가진 사나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것은 처용에 관계된 배경이야기의 복합성과 독창적인 학문의 속성과도 무관하지 않으므로 다양한 해석을 낳을 수 있기에 어느 한 방법으로 접근하여 처용의 정체를 밝힌다는 것은 자칫 독단에 치우칠 우려가 있다.

향가는 ‘한국 고유의 노래’라는 뜻으로 넓게는 삼국 이전의 시가로부터 좁게는 [서동요] 이후 신라의 정형가요에까지 이르지만, 학술적 용어로는 ‘향찰이라는 표기 체계로 신라에서 지어진 좁은 의미의 향가’만을 지칭한다.

한자의 소리(音)와 뜻(訓)을 빌어 우리말을 표기한 문자가 향찰(鄕札)인데, 이 향찰문자로 기록된 향가문학은 우리말을 우리 방식으로 처음 표현(기록)한 문자이다. 한역되지 않고 원문 그대로 가사가 전해오는 가장 오래된 시가이며 향가 작품마다 배경설화가 동반되어 문학과 역사가 어우러진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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