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와 우드스탁 "새로운 세기에 대한 예감..."

아이돌이란 시대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김윤석 기자 | 기사입력 2011/07/07 [11:32]

한류와 우드스탁 "새로운 세기에 대한 예감..."

아이돌이란 시대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김윤석 기자 | 입력 : 2011/07/07 [11:32]
아이는 어른을 보고 자라난다. 오랜세월 그것은 진리였다. 아버지가, 어머니가, 할아버지로부터, 할머니로부터, 그리고 이웃의 어른들로부터. 그렇게 부모세대의 방식은 마치 유전처럼 다음세대로 전해졌고 그것이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산업화는 그러한 전통적 사회구조를 해체해 버렸다. 사람들은 도시로 떠나버렸고, 도시로 모여든 사람들은 각박한 현실 속에 자식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 학교는 더 이상 자식을 돌볼 수 없게 된 부모들의 마지막 변명이었다. 아이들은 방치되기 시작했다.
 
그런 때 미디어의 발달로 아이들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아닌 또래들의 세상이었다. 어머니와 할머니가 아닌 그들 또래의 삶이고 문화였다. 우드스탁은 그렇게 전세계의 젊은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때는 기존의 기성세대의 방식을 부정하고 자신들만의 방식을 세우려 하던 청년운동이 정점에 달했을 때였다.
 
사실 아이돌이란 록에서 시작되었다. 청년들은 마치 사이비종교의 교주와도 같이 그들의 새로운 우상을 섬겼다. 그들이 하는 말과, 그들이 보이는 행동과, 그들을 꾸미고 있는 스타일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하나의 새로운 삶의 양식이 되었다. 말 그대로 우상이었다. 그리고 자본은 돈이 되는 것을 그대로 보아 넘기지 않았다. 자본과 미디어의 결합으로 그러한 새로운 삶의 방식은 순식간에 전세계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아이돌은 그러한 첨단에 있다고 보면 되었다. 원래는 록스타가 있고 그것을 미디어가 우상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있을까? 미디어는 스스로 우상을 만드는 방법을 찾게 되었다. 청년들이 바라는 새로운 삶의 방식. 말과 행동과 스타일과 패션. 그들 또래의 바람과 충동을 대신할 수 있는 존재를. 록의 쇠퇴는 사실상 그러한 청년문화의 변질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보면 된다. 더 이상 록스타는 청년문화의 대변자가 아니었다.
 
최근의 아이돌을 중심으로 한 한류의 확산을 보면서 문득 든 생각이었다. 멀리 유럽에서까지 한국의 아이돌에 열광하는 젊은이들이 나오고 있는 것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그러다가 KBS의 밴드서바이벌 <TOP밴드>에서 심사위원으로 나온 김종진씨의 "우드스탁" 발언을 듣고 무릎을 치고 말았다. 어쩌면 이것이 아니었을까.
 
문화란 무의식이다. 그리고 언어다. 다시 말해 그 시대의 바람이며 또한 충동이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바란다. 내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바란다. 내 이야기를 대신해주기를 바란다. 문화란 그래서 시대와 문화를 담아낸다. 과연 세계의 젊은이들이 한류를 통해서 - 한국의 아이돌을 통해서 보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첫째는 역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 이후 세계적으로 많이 침체되어 있다는 것이다. 1960년대 청년운동 역시 양차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등을 통해 절망과 공포를 체화한 청년들에 의해 촉발되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차이라면 당시의 우드스탁은 지금 세상을 이 모양으로 왜곡시키고 타락시키고 있는 기성의 질서를 부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지금의 아이돌은 그런 심각한 일들따위 잊으라 말하고 있다. 화려한 꿈을 통해. 잘 훈련된 멋진 퍼포먼스와 하려한 복장, 그리고 현실에 없을 듯한 아름다운 외모를 통해서. 그것은 절망과 체념에 지친 청년들에게 하나의 희망일 터였다.
 
더 이상의 희망은 없다. 기성의 질서를 깨부수는 것은 무리다. 하기는 한국사회에서 아이돌붐이 일어나게 된 것도 청년은 물론 기성세대의 좌절과 무관하지 않다. 위로받기를 원한다. 힘들고 절망스러울 때 누군가로부터 위로받기를 꿈꾼다. 그것은 가족이 아니다. 오히려 가족보다 더 믿을 수 있는 미디어일 것이다. 가족보다 더 밀착한 미디어에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실의 절망과 좌절을 지금 당장 어떻게 할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누구도 그런 방법따위 알지 못한다. 안다면 일찌감치 세계는 위기에서 벗어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가운데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그래도 꿈은 꾸어야 한다. 희망은 보아야 한다. 위로를 받아야 한다.
 
어째서 한국 드라마가 먼저 인기를 끌었는가? 한국드라마에서 가장 주를 이루는 특징이 무엇이던가. 가족이다. 정이다. 인정이다. 위로를 받는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내 주위에는 가족이 있다. 친구가 있다. 정이 있다. 사랑이 있다. 일본드라마를 꽤나 좋아하던 입장에서 그래서 "겨울소나타"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위안을 얻던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70년대 일본인들이 잊고 있던 순정시대의 순수와 사람의 정이 있다.
 
조금 더 적극적인 한류정책을 펼쳐보아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는 이유다. 물론 아직은 미미하다. 아직 세계의 대중문화에서 한국의 대중문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그다지 크지 않다. 문화적으로 한국의 이미지란 세계적으로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그동안 문화에 대해 등한시여기고 제대로 투자하지 않은 결과다. 가장 저평가된 나라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한국의 대중문화에 세계인에 통할만한 것이 있다면. 세계인들이 바라는 무언가가 한국의 대중문화에 있다면. 설레발일까? 하지만 분명 그러한 요구가 한류를 바라고 한류에 열광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한국 대중문화만이 갖는 무엇이.
 
그것은 단지 현지의 분위기를 쫓아 맞춰가는 것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자신들의 이제가지 보아 온 뻔한 어떤 것이 아니다. 새로운 것이다. 그들이 이제까지 겪어 보지 못한 것. 그래서 더욱 간절하고 절실한 것. 현지화보다는 차라리 보다 엄격하게 한류라고 하는 스타일을 정립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물론 한류라 정의하기에는 한국의 대중문화 가운데서도 스펙트럼은 너무 넓지만.
 
과연 맞은가. 하지만 여러 가능성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먼 - 잘 알지도 못하는 나라의 대중문화를 동경하여 그 나라의 말을 배우고 문화를 배우는 알지도 못하는 젊은이들처럼. 기꺼에 콘서트장을 채우고 그들의 춤과 노래를 따라하는 그 열정들처럼.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일까? 아니 항상 새로운 시대는 있어 왔다. 그때마다 아이돌도 그 모습을 달리 해 왔다. 지금 세계가 필요로 하는 것들 가운데 어쩌면 한국의 대중문화도 있지 않은가. 한국의 아이돌에게도 자리가 있지 않은가? 만일 그럴 수만 있다다면.
 
조금은 들뜬 것일까? 그런 것도 있는 것 같다. 언제 대한민국의 문화가 세계에 알려지고, 문화의 이름으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기억되었겠는가. 김구선생님도 말씀하셨다. 부강하여 잘살고 힘이 센 나라보다 문화가 강한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 꿈이 이루어지고 있다.
 
끝으로 과연 아이돌은 한국의 대중문화의 질서를 흐트려 놓는가. 아이돌은 언제나 있어왔다. 아이돌은 그 시대의 무의식의 산물이었다. 말한 충동과 바람. 과거의 비틀스도 그래서 아이돌이었다. 송골매도 아이돌이었다. 단지 필요로 하여 그들을 무대에 세우고 있을 뿐. 그들이 이제 세계로 나가려 하고 있다.
 
아무튼 또 한 번의 기적을 예감해 본다. 보다 세련되게, 보다 첨예하게, 어디에도 없는 한국만의 아이돌이 점차 세계로 퍼져나가리라. 세계의 젊은이들에. 세계의 사람들에. 시작은 미미하더라도. 꿈은 크게 가져 본다. 꿈이 현실이 될 수 있기를. 새로운 세기의 시작일 것이다. 그것을 믿는다.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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