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광복 특집 칼럼]성암의 사불응과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

이석우 이초려기념사업회 사무국장 | 기사입력 2024/08/12 [21:16]

[8·15 광복 특집 칼럼]성암의 사불응과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

이석우 이초려기념사업회 사무국장 | 입력 : 2024/08/12 [21:16]

성암과 간디

 

- 성암의 사불응과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 -



이 석 우 (이초려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전 용남고 교장)

 

 

1970년대 초반에 나는 중학생이었는데 초려선생의 재실에서 살았다. 사랑 쪽에는 방이 두 칸 있었는데 겨울 농한기에 선친께서는 숙부와 함께 마을 청년들 30여명에게 한문을 무보수로 가르치셨다. 명심보감, 소학, 논어, 맹자 등을 1:1로 가르치셨기에 밤중에는 목이 쉬셨다. 사람들로 빼곡한 방안에는 하나의 등잔불이 빛을 발했던 시절이다.

 

그리고 나서 선친께서는 한밤중에 시원한 동치미 국물로 목을 축이시고는 《성암집》 <부풍옥중일기> 편을 매일 외숙·외당숙을 포함해 나이든 청년들에게 강독해 주셨다. 한 권의 책과 등잔불을 가운데 놓고 7,8명이 빙 둘러 앉아 집중하고, 선친께서는 글자를 짚어가며 말씀해 나가셨다.

 

선친께서는 고단하셨지만 성암 이야기에 신바람을 내셨고, 학생들은 다음 장면이 무엇일까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당시 어렸던 나는 그 사이에 끼지는 못하고 옆방에서 귀동냥으로 들으면서 위인전에서 읽은 간디의 행적과 비슷하구나 생각하며 성암을 알아갔던 추억이 지금도 아련하다.

 

성암(醒菴) 이철영(李喆榮, 1867∼1919)은 초려선생의 9세손으로 종손 이하영의 동생이다. 성암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사람도 많지만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아서 이 글을 쓴다. 알더라도 성암의 진면목을 바르게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성암이야말로 의리로 일본 식민통치에 온몸으로 저항한 애국지사다. 인도의 독립을 위해 비폭력 운동을 주도한 마하트마 간디보다 더한 비폭력 저항운동의 화신이었다.

 

성암과 간디는 공간적으로는 엄청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시간적으로는 동시대 인물이었다. 성암은 1867년생이고 간디는 1869년생으로 성암이 2년 앞선다. 성암은 조선의 주권회복과 자주독립을 위해 일본에 저항하였으며, 간디는 인도의 독립과 인도인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영국에 저항하였다.

 

성암과 간디가 비폭력 저항운동을 통해 살아온 행적은 비슷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성암은 의리를 뼈에 사무치는 사상으로 무장하여 총칼 앞에서도 굽히지 않는 정신을 보였고 당당한 언변으로 일경과 일본인 관원을 굴복시켰다. 간디는 인도인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 투쟁하였다.

 

성암은 성리학자로 공부를 하면서 선비 정신으로 젊어서 항일 운동에 눈을 떴고, 간디는 영국유학을 하면서 인도인들의 어려운 생활고를 보면서 독립의지를 불태웠다. 성암은 갖은 옥고와 탄압을 겪으면서 1919년 53세로 서거하였고, 간디는 인도 독립이후 1948년 80세로 동족의 흉탄에 세상을 떠났다.

 

성암이 53세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은 일제 식민지 무단통치의 잔인하고 혹독한 탄압 속에서 고문을 당하고 출옥 후에는 온갖 감시를 당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영국의 식민통치가 영국신사 행위라고 찬양할 수는 없지만, 일본의 식민 통치행위는 영국의 인도 통치 행위보다 열배백배 훨씬 더 잔혹하였다.

 

이 점은 지금도 서울에 있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견학해 보면 그 실체를 들여다 볼 수 있다. 가혹했던 고문 현장을 보면서 인간으로서 이러한 행위를 차마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 대부분의 일본인은 예의바르고 선하지만, 일부 극우파들은 아직도 구태를 고치지 못했다.

 

간디는 “비폭력은 최고의 힘이다(Non-violence is the greatest force)”라는 명언과 함께 세계적인 비폭력 저항운동을 전개하였다. 1893년에는 인도인 이민 제한을 철회하기 위한 지문등록을 거부하였다. 1894년에는 인도인 차별대우 철폐를 국제사회에 고발하는 탄원서를 작성하였다.

 

간디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인도 독립의 대가를 위해 영국을 지지하기도 하였다. 1919년 이러한 약속이 파기되자 반영운동에 앞장서서 공직을 사퇴하였다. 영국 상품 불매운동을 펼쳤으며, 납세 거부 운동을 전개하였다. 성암은 의(義)를 내세워 불의에 1도 타협함이 없었지만, 간디는 이(利)에 타협함이 있었다. 아내의 치료에는 영국인 의사를 거부하였지만 자신의 치료에는 수용하였다.

 

성암의 비폭력 저항 투쟁은 ‘죽어도 일본의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는 사불응(死不應)’의 단호한 의지에서 그 진면목이 드러난다.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는 것은 의리에 어긋나는 일이다. 조선은 이 땅의 주인이고 일본은 이 땅의 손님인데 손님이 주인을 몰아내고 탄압하는 것은 의리가 아니다. 이러한 의리를 모르는 일본인은 개돼지 인간이고 핍박받는 조선인은 인의예지 인간이다.”라는 것이 기본 사상이었다.

 

성암의 일본 통치 행위에 대한 불복종은 늘 죽음을 무릅쓰는 고난이었다. 일제가 시행하는 정책에는 사불응으로 무조건 거부하고 따르지 않았다. 총칼로 위협하고 몽둥이로 학대하였지만 성암의 뜻을 굽힐 수는 없었다. 서거하는 날까지 체포와 투옥의 연속이고 요주의 감찰 대상이었다.

 

1910년 강제 합병이후 일본은 조선식의 호구단자나 준호구 제도를 철폐하고 일본식의 민적[호적] 신고를 추진하였다. 이는 조선인을 강압적·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조치였다. 성암은 이를 조선 땅에서 조선인을 일본 호적에 편입시킴으로써 조선인을 말살하여 일본인으로 인종을 개종하려는 불순한 의도로 파악하였다.

 

성암은 일본정부에 ‘치일국정부서’, ‘재치일국정부서’ 편지를 보내어 민적 신고에 반대하였다. 차라리 죽임을 당하여 조선의 귀신이 될지언정 일본의 신민(臣民)은 되지 않겠다고 거부하였다. 이는 성암이 서거할 때까지 탄압과 협박의 고초를 당하게 되는 가장 큰 빌미가 된다.

 

일제는 1914년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하고 토지와 세금을 수탈하기 위해 토지 신고와 측량을 실시하였다. 성암은 이를 강력 거부하였고 집안의 토지는 몰수되었다. 이 때부터 문중은 가난의 질곡에서 온갖 시련을 겪는다. 동척은 조선의 땅 40%를 국유화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성암이 사불응 불복종 운동을 펼치며 가장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 것은 묘적(墓籍)신고를 거부하였을 때다. 묘적신고를 거부하여 성암은 조상들의 묘가 파헤쳐져서 백골이 파손될까 보아 전전긍긍하였다. 그러면서도 조상들께서 의리에 따른 자신의 행위를 이해해 줄 것으로 생각하며 불복종 운동을 전개하였다. 충주의 한 백성이 신고 안 된 조상 묘를 일본 순경이 파헤치자 몽둥이로 쫒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찬양하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성암은 서구식 단발을 전통을 지키지 못하는 변질된 왜색문화의 강요라는 견지에서 거부하였다. 우리의 고유문화를 수호하고자 하는 의지에서 평생 보발을 유지하고 두루마기에 갓을 썼다. 부여주재소 유치장에 투옥되어 있을 때 강제 삭발하여 공주감영으로 이송한다는 소문이 들리자 순절하기 위한 단도를 몰래 준비시켰다. 자질들과 제자들이 가장 많이 노심초사한 것은 이 때였다.

 

신학문 도입은 일본이 침탈하기 위해 사주하는 학문이라 하여 거부운동을 전개하였다. 부여향교와 돈암서원에서 사람됨을 위한 전통적인 경서 공부를 뒤로하고 신학(新學) 교육과정을 설치하려 하자 이를 반대하는 편지를 보냈다. 편지 내용을 살펴볼 때 만약 성암이 오늘날 태어났더라면 가장 앞장서서 수용했을 것이다.

 

신문물도 일본의 식민지 침탈행위로 여겨서 철도나 우편 등의 이용을 거부하였다. 평생 동안 기차를 이용하지 않고 걸어 다녔다. 특히 기차는 조선 물산의 일본 강제 탈취로 보았다. 교통 요지였던 백제 고도 공주와 부여에 철도가 놓이지 못함은 그 연장선이라 할 수 있다. 우편을 이용하지 않고 불편하더라도 늘 집안사람을 시켜서 편지를 주고받았다.

 

일제의 식민 통치를 거부하여 인력동원, 문패달기, 부역 등의 행정 행위에 불복종하였다. 온갖 위협과 협박이 따랐지만 응하지 않았다. 거부에 따른 벌금 납부도 거부하였다. 만약 돈이 산같이 있더라도 조선 백성이 일본 기관에 금전을 납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른 일본의 공갈과 협박에 대하여 너희들이 믿는 것은 칼의 힘이고 내가 믿는 것은 의리의 힘이라 대응하였다.

 

감옥에 투옥되면서 일본 관리의 호출·소환·출석 요구에 거부하였다. 갓을 쓴 흰 두루마기 차림으로 포승줄에 묶여서 잡혀갈지언정, 자발적으로 걸어서 일본 관청에 가는 일은 없었다. 투옥 중에는 고관대작 관직으로 회유하였지만 나를 모욕하는 것이라며 거부하였다. 겉으로 협조하는 척하고 속으로 지조를 유지하라며 출소를 회유해도 의리에 맞지 않고 변절할 수 없다며 거부하였다.

 

 

상고해 보면 항일저항기 시대에 친일파를 제외하고 애국지사들의 항일 운동에는 두 축이 있었다. 한 축은 무력에 무력으로 대항하는 일이다. 침략자에 총칼의 힘으로 맞서는 일이다. 이러한 일을 안중근, 김좌진, 윤봉길 의사들이 해냈다.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나는 위대한 일이다.

 

또 다른 한 축으로는 비폭력으로 대항하는 일이다. 죽어도 일본의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는 사불응(死不應) 신념으로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으며 항거하는 일이다. 학자로서 논리적으로 항변하기도 하고, 거리에서 맨몸으로 운동하며 부딪치는 일이다. 성암 이철영과 유관순 등 유약하지만 정신적으로 강한 사람들이 해냈다.

 

우리는 정신적 문화유산이 늘 소중하다는 생각을 갖는다. 죽음을 무릅쓰고 지조와 절개를 지킨다는 것, 불의 앞에 굽히지 않는다는 것, 이러한 정신을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지니고 생활한다는 것은 막대한 힘이다. 이 정신이 바로 세계 속에 우뚝 설 수 있는 대한민국의 힘이라 생각한다.

 

성암에게서 배울 수 있는 점은 어떠한 탄압과 회유에도 휘둘리지 않고 죽어도 불의에 응하지 않는 사불응의 자세로 온갖 불리함을 감수하면서 꿋꿋하게 뚜벅뚜벅 자신의 올곧은 정신세계를 지켜 나가는 태도이다. 이정신이야말로 세계 모든 나라를 선진국으로 도약시키며 세계만방 모두 함께 잘 사는 지구를 만드는 원동력이다.

다시 광복절을 생각하면서 지조 있던 꼿꼿한 선비의 당당하고 떳떳한 삶을 기린다. 공주시에는 숭의사(崇義祠) 사당이 있어서 제향을 지내며 성암의 정신을 추모하고 있다. 성암의 의리를 존숭하고 본받고자 하는 유림들과 후손, 주민들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간절한 소망이라면 숭의사 아래에 성암기념관이 세워져서 성암의 불의에 대한 사불응 정신이 고양되어 의를 지키는 정신이 정립되는 교육의 장이 되었으면 한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배우고 느끼면서 불건전함에서 벗어나고 자신의 의로운 인생 가치관을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 참고로 ‘사불응(死不應 : 죽어도 일본의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이라는 단어는 《성암집》 <부풍옥중일기> 에 여러 번 나오기에 원용(援用)한 것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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