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성암 이철영 선생

이태구 (초려역사공원 한문학 전임강사)

안기한 | 기사입력 2024/02/26 [21:55]

아! 성암 이철영 선생

이태구 (초려역사공원 한문학 전임강사)

안기한 | 입력 : 2024/02/26 [21:55]

 

 

 

3.1절은 다가오는데 우리 사회는 아직도 여전히 친일 잔재 청산이 요원(遼遠)한 과제로 남아 있다.

 

주지하다시피 3.1운동은 일제 강점기에 조선인들이 일본제국주의의 위법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 3월 1일 ‘한일 병합 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자주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만세 운동을 시작한 사건으로 민족대표로부터 일반의 민초(民草) 심지어 어린 학생들까지 나서서 거족적이고 거국적으로 벌인 혁명적 운동이었다.

 

친일파는 누구인가?

 

한 마디로 말해 일제가 한국을 침략하여 1945년 쫓겨나기까지 일제의 한국침략과 식민지지배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민족을 배신한 자들이다.

 

자신과 집안의 이익과 안녕을 위해서 불법적으로 나라를 팔아넘긴 이후 민족 분열을 일삼으며 부정과 부패를 만연시킨 불의한 친일 반민족 행위자 세력으로 부일(附日) 협력이나 반민족 행위에 대해 조금도 부끄러움이나 죄의식이 없는 자들이다.

 

문제는 그들의 과오가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채 해방 이후 지금까지도 그 후손들이 잔존하여 국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창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니 통탄할 일이다.

 

성암(醒菴) 이철영(李喆榮) 선생(1867~1920)은 누구인가?

 

공주 중동골에서 태어난 구한말 거벽(巨擘)의 유학자이자 항일 독립운동가이었다.

 

선생은 충청오현(忠淸五賢) 중의 한 분인 대학자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 선생의 9대손이다.

 

어려서부터 자질이 특출하여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여망(輿望)이 있었고 장성하여 부여(扶餘)에 은거하던 처사(處士)인 겸와(慊窩) 유대원(柳大源)의 사위가 되어 그 분에게 수학하면서 처남인 경운(耕芸)병위(秉蔚)와 더불어 학덕을 연마하여 덕행과 문망(聞望)이 향방(鄕邦)의 지표가 되었다.

 

더욱더 은둔하여 심신을 검속해 모든 관록과 명예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누군가 과거시험 볼 것을 권하자 ‘지금 국운의 위태함이 실로 선비의 기풍이 쇠퇴하여 내수외양(內修外攘)의 실책(失策)에 말미암은 것이거늘 국가를 다스리는 자가 한갓 이록(利祿)만을 탐해 남의 집 일보듯이 하고 구제할 줄 모르니 이 어찌 지사(志士)와 인인(仁人)이 일할 수 있는 때인가?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 어찌할 수 없거든 두문불출하고 독서하면서 스스로 제 몸을 지키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은거하던 성리학의 대가(大家)가 실천적 구국운동에 나선 것은 무엇 때문인가?

 

선비는 의리의 향배(向背)를 알기에 나라의 흥망을 좌우하는 원기(元氣)라고 한다.

 

선비는 국가에 위기가 닥쳐오면 목숨을 바친다.

 

죽는 것이 같을 바엔 차라리 의(義)에 죽고 인(仁)을 이루는 데에 생명을 던진다.

 

살 길을 구차하게 얻어서 개, 돼지에게 굴복하며 차마 살 수 있겠는가?

 

나라를 배반하고 원수를 섬기면 편안할 수 있겠는가?

 

선생의 불굴의 업적과 자취를 연대기(年代記) 형식으로 살펴 보겠다.

 

선생의 삶과 공덕(功德)을 기록한 ‘성암선생묘갈명[醒菴先生墓碣銘, 재종손병주(屛洲) 이종락(李鍾洛) 지음]’을 통하여 선생의 항일(抗日)의 큰 자취를 따라가면 선생이 망국의 참상을 낱낱이 겪고 직접 항의하면서 일본 관원에 대한 단호한 질책, 을사오적(乙巳五賊)에 대한 예리한 비판, 서세동점(西勢東漸) 속에서도 주체성을 견지한 점에서 선생의 기개와 절의를 실감할 수 있다.

 

갑진년(1904)에 왜인(倭人)들이 철도 부설(鐵道敷設)을 서둘러 초려(草廬) 문헌공(文憲公)의 묘역(세종시 도움 1로 40 소재)을 침범하게 되자 선생은 유림(儒林)의 진정서(陳情書)를 갖고 두루 조정의 여러 대신을 만나서 통렬하고 절실하게 항의하여 노선을 변동하게 하였다.

 

을사년(1905)에 을사오적과 일제가 야합해 을사늑약(乙巳勒約)을 맺자, 선생은 의병을 일으키자는 ‘기의려문(起義旅文)’을 써서 “을사늑약은 법적 형식이 결여된 불법적인 조약으로 을사오적이 여기에 찬성하여 맺어진 것으로 백성들 의사와는 상반되는 것이며 합법적 조약이 아닌 늑약인데다 불법과 강제성을 띠었으니 무효”라고 항의하였으며 의리를 들어 나라의 원수를 갚고자 하였으나 형세가 여의치 못했다.

 

선생은 당대의 면암 최익현, 운강 이강년, 재상 조병세, 판서 민영환, 안중근 의사, 이준 열사 등 여러 위인들이 의를 들어 순절한 일에 대하여 각각 시(詩)로써 그 일을 말하고 그 뜻을 보이니 내용을 아는 자들이 정확한 의론임을 알았다.

 

이후 오랑캐 교육이 더욱 치성하여 각처의 향교와 서원에 신학문을 설치함에 사람이 바람에 쏠리듯이 다투어 나아가자 선생이 개탄하여 말하였다.

 

“중국이 망함에 우리의 도가 동방에 있거늘 지금 또, 이와 같으니 해(害)가 홍수와 맹수보다 심하다.

 

명색이 유학(儒學)을 한다는 자가 어찌 구제하는 한 마디 말도 없겠는가?” 무신년(1908)에 돈암서원(遯菴書院)과 부여향교(夫餘鄕校)에서 신학문을 가르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편지로 부당함을 설파하였다.

 

‘당우 3대의 도와 공자, 맹자, 정자, 주자의 학문은 우리 동방의 종교이니 여기에서 벗어난다면 곧, 오랑캐와 금수일 뿐이다.

 

춘추의 의리는 존화양이가 큼이 되니 어찌 이 오랑캐의 교육을 성인의 문에 들일 수 있는가?’라고 지적한 것은 부여향교에 보낸 글이요, ‘저 왜구가 맹세코 이 하늘을 함께할 수 없음은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거늘 지금 도리어 그들이 하는 짓을 본받아 선생의 영혼이 오르내리는 뜰을 더럽힌다.’라고 개탄한 것은 돈암서원에 보낸 글이다.

 

이 보다 앞서 일제가 속임수를 써서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칭하며 국호를 대한(大韓)이라 고치고 거짓으로 고종(高宗)을 광무황제(光武皇帝)라 높였다가, 정미년(1907)에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 파견을 빌미로 이등박문과 이완용 내각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다시 강제로 융희황제(隆熙皇帝)에게 선위케 하여 모든 정치 명령을 황칙(皇勅)이라 칭탁하여 자행하니 당시에 사대부들 모두가 황제의 높임을 영예로 여겨 다투어 앞장서고 있었다.

 

선생이 말하길 ‘조맹(趙孟)이 귀하게 해준 것을 조맹(趙孟)이 천하게 할 수 있다.

 

지금 거짓 높임이 장차 후일에 축출의 조짐이 될 것이다.

 

내가 이를 어찌할꼬? 단지 마땅히 나의 의를 행하여 옛 법을 따름이 옳다.’고 하였다.

 

기유년(1909)에 일제가 고종의 칙명이라며 국민의 호적을 만들려고 하자 이에 반대하여 의리로 호적에 편입하여 삶을 도모할 수 없다 하여 신복(臣僕)이 되지 않겠다며 그들의 간상(奸狀)을 낱낱이 지적한 ‘치일국정부서[致日國政府書]’를 써서 일본 정부에 보내니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갑신년(1884)에 죽첨진일(竹添進一)이 우리 임금을 협박하여 옮기고 우리 재상을 살육했으며 갑오년(1894)에 대도규개(大島圭介)가 우리 궁궐을 노략질하고 우리 전장(典章) 문물(文物)을 파괴했으며 을미년(1895)에 삼포오루(三浦梧樓)가 우리 국모를 시해했고 을사년(1905)에 이등박문(伊藤博文), 권조(權助), 호도(好道)등이 군대를 인솔하여 궁궐에 들어가 강제로 5조약을 체결하고 정부를 협박하여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고 국가 세금과 벼슬·포상·형법 등을 제멋대로 하고 궁궐을 파괴하며 우리 도성을 헐며 우리 군대를 해산하고 우리를 신첩과 노예로 삼고자 했으며 기타 인의를 꽉 틀어막아 윤리를 파괴하고 충량한 사민(士民)을 구속하여 국가의 원기를 다 끊어놓고 난적을 유인하여 앞잡이로 삼고 국가의 재원을 강탈하고 돈과 화폐를 환롱하여 백성의 고혈을 고갈시켰으니 전후 이런 종류의 포학을 이루 다 손꼽을 수 없다.

 

이는 전일의 서약을 따르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고 장차 인종을 바꾸려는 악독한 계책을 행하여 우리 국민을 한 사람도 살아남기지 않으려는 것이다.

 

악을 쌓으면 반드시 죽게 되고 지나치게 강하면 반드시 부러짐은 이치의 자연이니 지금 우리의 국운이 비록 비색하다고 하나 마침내 천리가 안정되어 인위적인 악을 이긴다면 어찌 오늘날 일본의 패망이 임진왜란의 참혹함을 따르지 않겠는가? 이쯤에서 그래도 그칠 수 있는 때에 이미 벌어진 춤판이라 말하지 말고 전자의 잘못을 말끔히 고쳐 양국이 각기 자국의 정치를 닦아 영원히 서로 편안할 수 있다면 이상 없는 다행이겠다.”​

 

글을 부여읍 주재소에 보내자 얼마 안 되어 왜(倭)의 장졸 6-7명이 와서 체포하여 하룻밤을 가두고 이튿날 홍산 경찰서로 압송하였다.

 

두목 왜가 물었다.

“무슨 할 말이 있는가?” 선생이 대답하였다.

 

“너희 나라가 처음부터 지금까지 세계 여러 나라에 감히 조선의 보호를 선언하고서 실상 흉악한 행동이 끝이 없음은 무엇 때문이냐?” 왜가 말하였다.

 

“한국이 일본 개화의 힘이 없었다면 이미 러시아의 소유가 되었을 것이다.” 선생이 말하였다.

 

“우리나라가 개화 이전에는 윤리가 밝고 교화가 행하여 500년을 이어왔는데, 개화 이후에 불과 수십 년에 이 지경으로 무너졌으니 나라를 망치고 사람의 도리를 말살하는 것이 너의 이른바 개화이다.

 

또, 개화의 근원이 실상 서양에서 나왔거늘 너희 나라가 영국에서 개화를 받아들일 적에 영국이 일본 정부를 강탈했느냐! 군대를 해산했느냐! 도성을 헐었느냐! 너의 임금을 겁박하여 옮겼느냐! 너의 왕비를 시해했느냐! 영국이 이런 일을 너희 나라에 행하지 않았거늘 너희는 어째서 조선에 행하느냐? 너희는 단지 중화의 죄인일 뿐만이 아니라 또한 개화의 죄인이다.”

 

왜가 말하였다. “시세 형편에 따라서 재단하여 처리한 것이다.”

 

선생이 말하였다. “너희 나라가 임금을 시해하여 개화하고 아비를 죽이고 즉위한 것 또한 시세 형편에 따르는 도인가?” 왜가 성내며 칼을 뽑아 위협하거늘 선생이 말하였다.

 

“내가 말한 것은 만고의 대의요 네가 믿는 것은 한 조각 칼날이니 너는 내 몸을 살해하는데 불과할 것이다.

 

어찌 나의 의를 빼앗을 수 있겠는가?” 왜가 또, 설문하였다.

 

“이웃 마을에 화재가 나면 가서 구제하는가?” “가서 구제한다.” 왜가 말하였다.

 

“우리나라 사람이 대한의 화재를 구제하기 위해 왔거늘 공은 어째서 원수로 대하는가?” 선생이 말하였다.

“너희는 화재를 구제하는 자가 아니라 방화자이다.

 

가령 너희 말대로라도 화재를 구제하여 불이 꺼지면 떠나야 하거늘 이에 머물면서 암암리에 불난 집 재산을 강탈하려 함은 무엇 때문이냐? 너희들은 속히 철수하여 돌아가라!”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 주재소의 왜가 다시 선생을 끌고 가 강제로 호적을 편입하게 하거늘, 선생이 단호히 꾸짖으며 말하였다.

 

“내 차라리 죽어 조선의 귀신이 될지언정 살아서 일본의 백성이 되고 싶지 않다.” 왜가 ‘내가 비록 일본 사람이지만 한국의 관리가 되어 이 지방을 책임졌으니 너는 지역민이니 정부의 명령을 어찌 감히 거부하는가?’하고 큰 몽둥이로 매우 심하게 구타하고 쫓아냈고 이어서 또, 홍산 경찰서에 잡혀 갔다. ​

 

선생이 두 편의 글을 썼으니 하나는 재차 일본 정부에 보내는 것이요, 하나는 경찰서장에게 보내어 고금의 역순(逆順)의 이치와 피차간에 편안함과 위태함의 방도로써 깨우쳤다.

 

경찰서에 이르니 여러 왜경이 법조문을 보여주면서 갖가지 방도로 달래고 협박하거늘 선생이 말하였다.

“죽이려거든 즉시, 죽일 뿐이지 무슨 힐난이 이 지경인가?” 왜가 말하였다. “죗값을 바치면 형벌을 면할 수 있다.” 선생이 말하였다.

 

“나는 우리 왕의 신민이니 죽일 수는 있어도 형벌을 쓸 수는 없다.” 왜가 심히 성내어 의관을 벗기려 하자 선생이 크게 꾸짖으면서 “군자는 죽어도 관을 벗지 않나니 너는 큰 칼로 찍으면 머리를 베고 허리를 끊을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시 한 수를 읊조렸다.

 

‘사십이 넘어 더디게 문을 나서니 온전히 돌아갈 것을 기약하여 반걸음조차도 조심하였네! 종사와 백성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몸과 뼈가 가루가 된들 의를 어찌 사양할까?’

 

​왜는 마침내 억지로 의관을 벗기지 못하고 어지럽게 구타하면서 축출하였다.

 

경술년(1910) 가을에 선생이 양존(佯尊-거짓 높임)이라고 예언한 것이 그대로 들어 맞았으니 황제로 높이자고 주장한 자들이 장차 부끄러워 땀 흘릴 겨를조차 없을 것이다.

 

왜가 강제로 합방조약을 체결하고 양여(讓與)했다는 말로 국중에 포고하여 황실을 이왕가(李王家)라 하고 각 군에 주재하는 왜로 하여금 합방의 가부를 우리 국민에게 물어서 ‘만일 불가하다 하면 마땅히 혹독한 재앙이 있을 것이다’ 위협하였다.

 

이윽고 왜 헌병이 와서 물었다. “합방한 사실을 들었는가?” 선생이 말하였다. “내가 지금 나라의 원수를 갚지 못하였으니 이런 말은 듣고 싶지도 말하고 싶지도 않다.” 왜가 더 이상 힐난하지 않고 가더니, 며칠 뒤 왜병이 와서, ‘일본 대대장이 어제 본 군에 도착하여 공의 고명함을 듣고 우리들로 하여금 데려오라 했다.’ 하거늘 선생이 말하였다.

 

“강약이 같지 않으니 너희가 체포해 갈 수는 있어도 만일 말로 부르면 비록 너희 임금이 불러도 의리상 갈 수 없다.”

 

왜병이 매우 급하게 잡아갔다.

 

​이 때 처남 경운(耕芸)과 함께 체포되어 부여읍에 들어가 군청의 임금 어진(御眞)을 모신 전정(殿庭)에 이르러 북쪽을 바라보고 통곡하자 왜가 말하였다.

 

“어찌하여 곡하는가?” 선생이 말하였다.

 

“이곳은 곧 우리 500년 종사가 있던 곳인데 지금 우리나라가 너희들의 손에 전복된지라 그래서 곡하노라!”왜가 연설 상을 설치하고 군민 수백 명을 불러 모아 놓고 강제로 선생을 당에 오르게 하거늘 선생이 ‘전패를 받든 곳에 의리상 감히 오르지 못한다.’하자 여러 명의 왜가 붙잡아 올려놓고 이른바 연설이라는 것이 우리를 달래고 협박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선생이 귀를 가리고 앉으니 왜가 성내어 칼로 베려 하거늘 선생이 목을 들이대니 왜가 도리어 물러나면서 말하였다.

 

“완고한 유생이 나라를 위해 통곡하는 것을 내가 그르다 할 수 없으나 단지 지금 합방은 조선이 가난하여 자치할 능력이 없어 누차 양여(讓與)했기 때문에 부득이 받은 것이거늘 너희들이 도리어 우리를 원수로 여김은 무엇 때문인가?” 선생이 말하였다.

 

“너희 나라가 강화도조약(1876) 초부터 우리의 반역자를 불러들여 금일 너희 계획을 달성하고 감히 양여설로 우리 백성을 속이고 천하의 이목을 가리고자 하는가? 내가 비록 만 번 죽어도 지키는 바는 변하지 않는다.” 왜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망국 후에 고사리를 뜯어먹다 굶어죽었다는 글을 써서 보여주고 집으로 보냈다.

 

이후로 왜의 염탐이 더욱 빈번히 하여 모든 계책을 다 썼지만 끝내 거절하고 모든 일에 저들을 거쳐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일절 하지 않았다. ​

 

이 때 왜는 국민으로 하여금 각기 산과 밭을 측량하게 하면서 하지 않으면 국유로 소속시키겠다고 위협하거늘 선생이 종씨(從氏)와 의논하면서 말하였다. “사가의 좋은 일과 궂은일을 마땅히 국가와 함께 해야 할 것이니 원수 오랑캐에게 구걸하는 것은 차마 못 할 짓이다.” 왜가 또 묘적(墓籍) 신고를 하라면서 분묘(墳墓)의 화(禍)로써 협박하거늘 선생이 역시 죽음을 맹세코 따르지 않고 ‘차라리 선영(先塋)과 함께 화를 받을지언정 어찌 묘적을 가지고 원수 왜를 따르겠느냐?’는 시를 지었다.

 

일찍이 철도시를 지어 ‘남은 이용해도 나는 이용하지 않으니 괵나라를 멸망시킨 것이 다른 길이 아니다.’ 하였고 심지어 차와 우편마저도 절대로 이용하지 않았다.

 

갑인년(1914) 가을에 일제가 강요하는 민적(民籍) 등재를 선생이 계속 거부하자 체포하여 협박했다. 선생 같은 대표적인 지사를 훼절시켜서 백성들을 계도할 구실을 삼고자 했으나 굴하지 않고 저항했고 이 때문에 그는 계속 옥고를 치렀다.

 

분대장이 말하였다. “일본을 배척하는 뜻을 지녔다는 말을 듣고 누차 만나려 해도 한결같이 완고하게 거절하고 민적(民籍)은 국가의 큰 정사거늘 끝내 신고하지 않으니 이는 무슨 행위인가?”

 

선생이 말하였다.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것[不事二君]과 존화양이(尊華攘夷)일 뿐이다.” 왜가 칼을 내밀면서 “지금 온 국민이 순종하지 않는 이가 없거늘 너는 유독 무슨 마음으로 이같이 어긋난 짓을 하는가?” 하고 그 길로 판옥에 굳게 가두고 경계를 심하게 하였다.

 

며칠 뒤 왜가 힐문하면서 말하였다.

 

“네가 이로써 결약하면 능히 너희 나라를 회복하겠는가?” 선생이 말하였다. “과연 내 마음과 내 행동같이 하면 어찌 다만 내 나라만을 회복하겠는가? 실로 천하 금수의 풍속을 바꿀 수 있으되 단지 나 같은 자가 적을 뿐이다.그러므로 너희들이 이처럼 횡행하는 것이다.”

 

하루는 공주 경무부장이 포병 열두어 명을 거느리고 끌어내 물었다.

“네가 이 아무개인가?” 선생이 말하였다. “그렇다. 네 이름은 뭐라 하는가?” 왜가 버럭 소리 지르며 말하였다.“감히 이렇게 당돌할 수 있는가?” 선생이 말하였다.

 

“의리로 말하면 너는 나의 원수요 존비로 말하면 나는 중화(中華, 도리를 지키는 문명인)이며 너는 오랑캐이니 너라 호칭함이 어찌 공손하지 않다고 하는가?” 왜가 말하였다.

“들으니 네가 민적에 들지 않는다 하니 바로,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의리이다.

그러나 백이와 숙제는 은나라가 망함에 굶어 죽었는데 너는 어째서 죽지 않는가?” 선생이 말하였다.

 

“한나라의 소중랑(蘇中郞, 이름 무(武))은 북해 상에서 한나라의 부절(符節)을 지닌 채 죽지 않았고 송나라의 김인산(金仁山)은 세상을 등지고 금화산에 숨어 살면서 생을 마쳤고 우리나라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은 중국 심양에서 항의하다 살아 돌아왔으되 의론하는 자들이 백이·숙제와 다르게 보지 않았으니 지금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어찌 옳지 않은가?” 왜가 말하였다.

 

“옛적에 백이·숙제와 칭송은 같고 행실이 다른 자가 있으니 이윤(伊尹)이 이런 분이로되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닌가?’하였으니 어찌 이를 본받지 않는가?” 선생이 말하였다.

 

“하나라 걸왕(桀王)은 천자요, 상나라 탕왕(湯王)은 제후라서 이윤에게는 다 군신의 의리가 있고 단지 선악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 말이 이와 같았거늘 세상에 임금을 잊고 원수를 섬기며 행실이 개돼지 같은 자가 감히 이윤을 이끌어 구실을 삼으니 이는 성인의 글을 잘못 읽고 이윤(伊尹)을 잘못 인식한 자이다. 대저 남의 나라를 빼앗으면 종국엔 반드시 패망하는 법이다.

 

또, 사람과 짐승은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얼음과 숯불은 서로 용납하지 못하니 각기 자기 나라를 지킨다는 뜻으로 돌아가 너희 임금에게 고함이 옳다.” 왜가 멍한 모양으로 돌아갔는데, 이후에 혹은 별관에 가두고 혹은 감옥에 가두어, 늦추고 핍박함이 한결같지 않았지만 끝내 굽히지 않을 줄 알고 년 말을 기하여 석방하니 모두 70일 감옥에 있었다. ​

 

한 절의로 시종일관함에 말이 바르고 이치가 순탄하니 저들 또한, 감복하여 혹은 양반이라 호칭하고 마침내 일등 대남자라 호칭했으며 심지어 왜에게 붙던 자들까지도 처음에 심히 비웃더니 뒤에 머리를 굽혀 공경을 다하니 정의가 취향을 달리하는 사람까지도 감복시킴이 그러하다.

 

옥중에서 지은 시에 ‘5~6년 전에 이미 이곳을 거쳤으니 여생 지금 다시 죽음으로 기약하네! 찬바람 이는 감옥 외로운 등불 아래 누워 청음(淸陰)의 설교(雪窖) 시를 읊노라!’ 또, ‘오랑캐(犬羊) 무리 속에서 이미 30일, 가정 일 모두 잊어 단지 내 몸뿐이라네. 창과 칼이 공중에 눈 서리처럼 번득이되 마음엔 한 덩어리 봄기운이 줄어들지 않네!’ 가 있어 불의에 굴하지 않는 기개를 엿볼 수 있다.

 

여기에서 선생이 현재의 당한 위치에서 도의를 실천하여 그처럼 가혹한 감옥 생활이 마치 하루살이가 큰 나무를 흔드는 정도도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

 

무오년(1918) 가을에 또 다시 수감되었다가 즉시 석방되었다.

 

12월에 고종의 승하 소식을 듣고 제생을 거느리고 애도하며 성복(成服)하고 국복록(國服錄)을 지었다.

 

기미년(1919)에 해소와 천식으로 생명이 꺼져가는 가운데서도 신기가 또렷하여 검속을 평소와 같이 하였다.

 

하루는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내 장차 죽을 것이다. 다른 생각은 없으나 단지 10년간 왜의 사찰로 끝내 다시 선영을 참배하지 못한 것이 한이다. 너희들은 용기백배하고 몸단속을 다하여 자신의 대책을 확립함이 옳다.

또, 우리 부모상에 가난으로 장례 범절을 알맞게 하지 못하여 마음에 부족함을 느끼니 내가 죽으면 단지 심의(深衣)와 이불 한 벌이면 충분하다.”

 

 

 

기미년 12월 6일(1920.1.26.)에 운명하니 향년 53세였다.

 

1968년 3월에 공주향교와 유림이 선생의 덕행과 행적을 기리기 위해 발의하고 전국 18개 향교, 서원, 사우가 찬성하여 국비와 도비, 후손들의 의연금을 모아 1971년 충남 공주시 상왕동 중동골에 있는 숭의사(崇義祠)를 건립하고 매 년 3월 17일 공주시 유림들이 추모 제향를 올린다.

 

성암 선생은 혼란한 시대를 만나 은거하여 있었지만 국내 상황과 세계정세를 두루 모르는 것이 없어 시대를 상심하고 국가를 걱정하는 것이 천상 큰 선비의 충심이었다.

 

비록 지극히 무도한 일제가 극도로 형틀을 씌우고 박해하였지만 끝내 굽히지 않고 도리를 지켰으니 훌륭한 선생의 큰 덕과 큰 절의는 만대의 사표(師表)가 되고도 남음이 있다 하겠다.

 

선생의 기의려문, 민적법 반대와 단발령의 항거 그리고 `부풍옥중일기`에 나타난 항일독립정신은 새로운 대한민국 미래 100년의 시대정신이 아닐 수 없다.

 

기유일기, 경술일기, 갑인일기, 무오일기 등 항의기사는 차마 필설로 다 설명할 수 없다.

 

선생을 모시는 숭의사는 공주시 중동골길 78~5에 소재하고 2002년 국가보훈부의 국가현충시설로 지정되고 1990, 12월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고 2012, 4월 공주시의 지원으로 선생을 추모하는 묘정비가 건립되었으며 2019, 12월 순국 100주기에 `성암이철영평전`이 간행되었다.

 

선생은 가고 안 계시지만 그 뜻과 정신을 기리고 이를 널리 현창하는 일은 이제, 우리 후세대들의 역할이며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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