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시대의 신문(新聞)

김민수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10/09/25 [16:33]

대한제국 시대의 신문(新聞)

김민수 칼럼니스트 | 입력 : 2010/09/25 [16:33]
[시사우리신문]한성순보(漢城旬報)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신문으로 정부에서 발간한 신문이었으며 한문으로만 기사를 썼다. 독립신문은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徐載弼)이 정부의 자금을 지원받아 1896년 4월 7일 창간하였고 민중을 위해 알기 쉬운 한글 전용 신문을 만들었다.1897년 1월 5일자부터 국문판과 영문판(The Independent)을 분리하여 신문을 격일간으로 주(週) 3회 발행하였으며 국민을 위하여 무슨 일이든지 대변자가 되고, 정부가 하는 일을 백성에게 전하고 백성의 정세를 정부에 알릴 것이며 부정부패, 탐관오리 등을 고발할 것을 천명하였다. 1898년 5월 14일 서재필이 미국으로 돌아간 후 주필 겸 관리자로 운영을 맡은 윤치호(尹致昊)는 1898년 7월 1일부터 일간으로 발전시켰다.

제국신문은 1898년 8월 10일 이종일(李鍾一)이 창간하였으며 창간호부터 1910년에 폐간될 때까지 대한제국의 대표적 민족지로서 황성신문(皇城新聞)과 함께 가장 오랜 발행 실적을 기록하였고 한글 전용을 고수하여 일반 서민층과 부녀자들 간에 독자가 많았다. 제국신문에는 이종일을 비롯하여 이승만(李承晩)도 초기에는 논설을 집필하였고, 최강(崔岡) ·장효근(張孝根) ·정운복(鄭雲復) ·이인직(李人稙) ·이해조(李海朝) 등이 제작에 참여하였다.처음에는 제호도 뎨국신문으로 한글을 사용하였으나, 1903년 7월 7일부터는 한자로 바꾸었고, 본문은 한글을 전용하여 국한문을 혼용하던 황성신문과는 색다른 특징을 보여주었으며, 한글의 보급과 대중화에 큰 업적을 남겼다.

황성신문은 남궁 억(南宮檍) ·나수연(羅壽淵) ·장지연(張志淵) ·박은식(朴殷植) ·류근(柳瑾) 등이 주 2회간이던 대한황성신문의 판권을 인수하여 황성신문으로 개제하고 일간신문으로 창간한 것이다. 국 ·한문 혼용의 이 신문은 애국적 논필로써 대한제국의 정국을 매섭게 비판하다가 1905년(광무 9) 을사늑약 직후 장지연의 유명한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으로 장지연이 구금되고, 신문도 정간당하였다가 수개월 만에 복간되었으며 고조 광무제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

대한매일신보는 1904년 2월 발발한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대한제국에 왔던 영국인 베델(Ernest Thomas Bethell)이 양기탁(梁起鐸) 등 민족진영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7월 18일에 창간하였으며 논설진으로는 양기탁 외에 박은식(朴殷植) ·신채호(申采浩) 등이 있었다.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되던 무렵은 일본이 대한제국 언론에 대해 검열을 실시하고 직접적인 탄압을 가하기 시작한 때였으나 대한매일신보는 발행인이 영국인이었기 때문에 주한 일본 헌병사령부의 검열을 받지 않고 민족 진영의 대변자 역할을 하였다.

대한매일신보는 창간 당시 6페이지 중에서 2페이지가 한글 전용이었고, 4페이지는 영문판이었으며 1905년 8월 11일부터는 영문판과 국한문신문을 따로 분리하여 두 가지 신문을 발간하였다. 영문판의 제호는 The Korea Daily News 였고, 창간 당시는 순한글로 만들었던 국문판은 국한문을 혼용하여 발간하였다. 1907년 5월 23일부터는 따로 한글판을 창간하여 대한매일신보사(社)는 국한문 · 한글 · 영문판 3종의 신문을 발행하였으며, 발행 부수도 세 신문을 합쳐 1만 부를 넘어 당시 최대의 신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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