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공소장 전문

시사우리신문편집국 | 기사입력 2019/05/19 [23:33]

김대중 공소장 전문

시사우리신문편집국 | 입력 : 2019/05/19 [23:33]

자유한국당 심재철 국회의원은 19일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증거를 역사법정에 보전신청을 했다.이와관련해 심 의원은 김대중 공소장 전문을 공개했다.

▲ 증거목록     © 시사우리신문편집국

 

이에 본 보는 국민의 알권리를 제공하고 언론의 자유를 위해 김대중 공소장 전문을 공개하게 됐다.

 

다음은 심재철 의원이 제공한 김대중 공소장 전문이다.

 

◇ 죄명 

가, 내란 음모 

나, 내란 선동 

다, 계엄법 위반 

라, 계엄법 위반 교사 

마, 국가보안법 위반 

바, 반공법 위반 

사, 외국환관리법 위반

 

◇ 피고인등 인적사항 

 

1. 김대중 (55·무직) 가, 나, 다, 마, 바, 사 

2. 문OO (62·목사) 가, 다 

3. 이OO (52· 교수) 가, 다 

4. 예OO (52·전 국회의원) 가, 다 

5. 고OO (일명 고O 47·시인)가, 다, 라 

6. 김상현 (45·무직) 나, 다 

7. 이OO (30·학생) 가, 다 

8. 조OO (30·학생) 가, 다 

9. 이해찬 (27· 학생) 가, 다, 라 

10. 이OO (27· 무직) 가, 다 

11. 송OO (32· 학생) 가, 다 

12. 설훈 (27·학생)가, 다 

13. 심재철 (22·학생) 가, 다 

14. 서OO (62·교수) 다 

15, 김OO (47·양돈업) 다 

16, 한OO (45·국제「앰네스티」 한국위원회 전무이사) 다 

17, 이OO (45·목사) 다 

18, 김OO (65·무직) 다 

19, 한OO (44·교수) 다 

20, 유OO (54·교수) 다 

21. 송OO (52·무직) 다 

22. 이OO (54·소설가) 다 

23. 이택돈 (44·전 국회의원) 다 

24. 김녹영 (55·전 국회의원) 다

 

◇ 적용법조 

l. 피고인 김대중 

민법 제90조 제1항, 제2항, 제87조 

계엄법 제15조, 제13조, 계엄포고 제1호 

국가보안법 제1조 제1호. 

반공법 제5조 제1항. 

외국환관리법 제35조, 제17조 게1항 

형법 재37조, 제38조 

 

2. 피고인 문OO, 이OO, 예OO, 이OO, 조OO, 이OO, 심재철 

형법 제90조 제1항, 제87조 

계엄법 제15조, 제13조. 계염포고 제1호 제1항 

형법 제37조, 제38조

 

3. 피고인 고OO, 이해찬 

형법 제90조 제1항, 제87조 

계엄법 제15조, 제13조. 계엄포고 제1호 제l함, 형법 제31조 제1항, 형법 제37조 

형법 제38조

 

4. 피고인 김상현 

형법 제90조 제2항, 제1하 제87조 

계엄법 제15조, 제13조 

계엄포고 제1호 제1항, 제2항 

형법 제37조, 제38조

 

5. 피고인 송OO, 설훈 

형법 제90조 제1항 제87조 

계엄법 제15조, 제13조 

계엄포고 제1호 제1항, 제2항 

형법 제37조, 제38조

 

6. 피고인 서OO, 이OO, 김OO, 한OO, 유OO, 송OO, 이OO. 

계엄법 제15조, 제13조 

계엄포고 제1호 제1항 

형법 제 37조, 제38조

 

7. 피고인 김OO, 한OO, 이택돈, 김녹영 

계엄법 제15조, 제13조 

계엄포고 제1호 제1항, 제2항 

형법 제37조, 제38조.

 

◇ 공소사실 

피고인 김대중은 1924년1월16일 전남 신안군 하의면 OO리 OOO에서 생모 장노도의 아들로 출생, 1925년7월7일 동면 후광리 97 김윤식의 O자로 입적하여 1939년3월 목포북교 초등학교, 1944년3월 목포상업학교를 순차 졸업한 후, 1961년5월13일 감원도 인제지구 보궐선거에서 제5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이래, 목포지구에서 신민당소속으로 제6대,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1971년4월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시 신민당대통령후보로 출마하여 낙선되었으나, 동년 5.2. 제8대 신민당 전국구의원으로 당선되고 1973년8월 이래 계속하여 각종 기도회·강연회 등을 통하여 반정부활동을 하여 오다가 1976년3월1일 명동성당에서의 소위 민주구국선언문 발표사건(이하「명동사건」이라 칭함)을 주도하여 1977년3월22일 대법원에서 대통령 긴급조치 제9호 위반으로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78년12월27일 형집행정지 결정으로 석방되었다가 1980년2월29일 복권된 자. 

 

제1. 피고인 김대중은 

1945년8월15일 해방직후인 동년 9월경 건국준비위원회의 선전책으로 일하다가 남노당 선전책으로 암약하던 임영춘의 권유로 동 위원회 목포시 지부에 가입하여 선전부원으로 있으면서 목포 청년동맹에 가입 활동하다가, 동년 10월경 건국준비위원회와 목포 청년동맹이 해체되자 당시 신민당(후에 공산당·인민당과 합쳐 남노당이 됨) 목포시당위원장이며 그 후 남노당부위원장으로 암약하다가 행방불명된 이채현의 권유로 위 신민당에 입당하여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공산계열의 행동전위대원 집단인 민주청년동맹 목포시 지부에 가입,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중, 1946년10월1일 위 지부원등이 목포경찰서 남교동 파출소를 습격하여 경찰관을 살해하고, 파출소를 방화한 폭동사건 배후조종혐의로 구속되어 조사를 받다가, 당시 한민당 목포시당 부위원장이던 전처 망 차용수의 망부 차보륜의 신원보증으로 석방되고, 1949년1월경 보도연맹 목포시 지부에 가입하여 운영위원으로 활동 중, 동년 4월경 전남 신안군 임자면 출신으로 남노당 섭외부원 겸 민주주의 민족전선 부위원장으로 지하에서 암약중이던 유재식에게 활동자금을 제공한 사실로 전남도 경찰국에 체포되어 10여 일 간 구속조사를 받던 중 당시 해군 목포 헌병대장이던 박OO(현 김대중 경호담당차장)의 신원보증으로 석방되고 1967년5월 일자 미상경 목포시 죽동 소재 한일여관 등에서 북괴로부터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 야당인 신민당 입후보자가 다수 당선되도록 김대중 등을 지원하라”는 지령을 받고 남파되어 의도적으로 접근해온 소위 임자도 거점 간첩 정태묵(1972년12월8일 대법원에서 간첩죄로 사형판결을 선고받아 집행된 자)을 2회에 걸쳐 접촉하여 그로부터 “6·8선거는 관의 금력에 의한 관제 선거가 예상되므로 투표직전까지 선거조직을 노출시키지 말 것” “여담이 금력공세를 가하면 효력이 감소될 때까지 방임할 것” “선거시에는 관을 자극하는 언동으로 탄압을 유도하여 동정표를 얻도록 할 것” “선거운동을 도심지보다 변두리에 집중할 것” “여당의 금력공세 상황을 구체적으로 증거를 포착하여 여론에 호소할 것” “지방발전만을 외치는 여당의 전략에 말려들지 말 것”등 선거전략을 교도 받는 동시에 목포 산정국민학교에서 교사로 종사하던 위 정태묵의 처의 동료교사인 임자도 출신 성명 미상을 그 운동원으로 소개받고 동 선거전략에 따라 선거운동을 하여 당선되고, 1970년9월29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제7대 대통령후보로 지명 받게 되자 시국관을 표명한다는 구실로 지방대도시를 순회하면서 사전선거유세를 통하여 “정부는 남북 간의 군사적 우열에만 집착하여 의도적으로 위기의식을 조장하고 있다.” “향토예비군을 조직하여 수백만 국민을 정치적 군사조직으로 묶어 놓았다.” “남북간 긴장완화를 위하여 김일성과 대담할 용의가 있다.”라고 주장하는 등 북괴의 위장평화통일선전활동에 동조하고,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낙선되자 시국을 관망하다가 1972년10월11일 지병인 관절염치료를 구실로 도일체류 중, 동월 l7일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정부에 대한 반감을 갖고, 반한·반정부 교포 및 미·일 조야의 용공인사들의 지원을 받아 소수교포의 불만을 마치 대한민국 국민의 의사인양 선전하여 미국·일본 등 우방국들에 반한 여론을 불러일으켜 우방정부로 하여금 반한 정책을 쓰도록 유도하여 대한민국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는 한편, 국내 반정부세력을 육성, 강화한 후 이를 상호 연계시켜 외세의 압력과 내부봉기에 의하여 정부를 전복하고 정권을 쟁취한다는 목표 하에 귀국을 포기하고 1973년8월 귀국 시까지 5회에 걸쳐 미국과 일본을 왕래하면서 각종 강연과 출판 또는 기자회견 등을 통하여 국제적으로 반한 여론을 조성하기로 하고,

 

1972년11월10일 동경외신구락부 연설을 통하여 “나는 이 자리에서 경고하고자 한다. 만일 지금에 와서 미국, 그리고 아세아의 강대국으로 등장한 일본이 종래의 무기지원에 있어서의 정책적 과오에 대하여 일대 전환을 하지 않는다면 자유도 빵도 없는 아세아 각국의 인민은 빵이라도 보장되는 공산주의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고 하고,

 

1973년2월23일 “뉴욕·타임스”지와의 회견을 통하여 “한국은 자유도 빵도 없는데 반해 북한은 비록 자유는 없다고 해도 빵이 보장된다. 나의 이러한 입장은 북한 공산주의자들도 인정하고 있다”고 하고,

 

동년 3월21일 일본 “하꼬네”에서 개최된 민족통일협의회 등 소위「베트콩」파 단체간부들의 입관법 연수회에서의 강연을 통하여 “나는 결코 통일하면 공산당을 죽이는 그러한 반공통일을 하자는 것도 아니오, 승공통일을 하자는 것도 아니다. 우리도 공산당의 존립을 보장해 주어야하며 이북에 김일성 주석을 중심으로 한 엄연한 정권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고 하고,

 

동년 4월24일 미국 “시애틀” 소재 “워싱턴” 대학에서의 강연 및 1973년7월6일 미국 워싱턴 소재 “메이후라워 호텔”에서 개최된 한국민주회복 통일촉진국민회의 발기대회 강연을 통하여 “괴뢰, 괴뢰 하는데 무슨 놈의 괴뢰냐. 공산주의란 기정사실을 우리는 27년간이나 무시해왔는데 이북은 공산당으로 안정되어 있으나 이남은 민주체제도 안정되지 못했고 오히려 혼란과 불안, 민생고만 극심할 뿐이다. 또한 김일성이 주체성 등을 확립시킨 것은 잘한 일이 아니냐. 한국의 6·23 평화통일 외교선언은 동·서독처럼 남북분단을 영구화하는 것이므로 반대한다”고 하고,

 

동년 5.18. 미국 샌프란시스코 국제학생회관 강연을 통하여 “내가 집권하면 남북 연방 체와 대중경제를 실시하겠다. 교포들은 앞날의 수권태세를 확립하여야하며 그 방법으로는 청와대와 백악관에 계속 편지를 내어 항의하여야 하고 특히 경제원조의 부정사용에 대하여는 백악관에 이를 항의하여 중단하도록 주장하여야 한다”고 하고,

 

동년 5월21일 재미교포신문 “코리아·저널”지 및 동년 7월1일 “한민신보” 기자와의 대담을 통하여 “남북은 한반도에서의 외군철수, 쌍방정권의 인정, 정치·경제 분야의 전면적 교류를 통하여 급속한 동질성을 회복하고 연방제롤 만들고 통일 후의 5년 간은 거국정부를 세워야 한다” 고 하고,

 

동년 7월경 일본에서 발간된 “독재와 나의 투쟁” 책자에서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위해서는 연방제를 만들어야하며 북한이 종래부터 주장해 온 남북평화공존과 교류, 그리고 민족화해주장 등은 나의 통일관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고 하는 등 각종 기자회견·시국강연·책자출판 등을 통하여 북괴의 통일전선과 선전선동에 동조 찬양하는 주장을 하는 등 반국가 활동을 하여 오다가, 1973년7월6일 위 “메이후라워 호텔”회의실에서 재미 반한 교포 임OO· 안OO· 동OO· 김OO· 정OO 등 30여명과 회합하여 “한국민주회복 통일촉진 국민회의 미국본부”를 결성, 명예회장이 된 다음 지리적으로 대한민국과 인접되어 있고, 북괴 및 조총련의 지원을 받아 활동하고 있는 반한 세력이 준동하는 일본을 자신의 집권투쟁의 근거지로 하기로 결심하고,

 

 

 

1. 북한 공산집단은 정부를 참칭하고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구성된 반국가단체이며 재일 조선인 총연합도 북한공산집단의 지령에 따라 대남 적화통일을 기본목표로 설정하고 활동하는 반국가단체라는 점을 알고 있음에도 1973년7월8일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일본본부(이하 “한민통”이라 약칭함)를 결성하기 위해 미국에서 도일하여 동일부터 동향출신인 동경거주 재일교포 김종충의 주선으로 동경 “신주꾸” 호총정 2정목 105. 원전맨숀 809호실에 한국민주제도 통일문제연구소 동경사무소라는 명칭의 사무실을 개설하고 한민통 결성준비에 착수하여 동조자를 물색함에 있어, 재일교포 배동호는 1971년1월31일경 조총련의 지령에 따라 일본유학생 이동일을 포섭 시도하다가 동인의 정체가 탄로되어 동년 7월경 민단에서 제명되고 1972년8월2일 7·4남북공동성명을 계기로 소위남북연방제 방식에 의한 남북통일 실현을 반대하는 세력과 투쟁할 목적으로 조총련과 야합, 민족통일협의회를 결성하여 수석의장으로 활동하면서 “베트콩”파 단체들을 규합, 반 국가, 민단파괴 활동을 주도한 자이며,

 

동 김OO는 1967년5월경 제7대 국회의원 선거시 신민당 전국구후보로서 조총련 자금을 반입한 혐의로 구속되어 조사를 받고 조총련과 공동으로 한일회담 및 월남파병을 반대한 자이고,

 

동 곽동의는 김OO의 사위이고 1971년8윌경 동 김상현으로부터 조총련의 배후조종을 받아 활동한다는 사실과 1972년2월경 방일시 주일한국대사관 성명 미상직원으로부터 북한에 왕래한 사실이 있어 사상적으로 불순하니 접촉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은 사실이 있는 자이고,

 

동 정OO은 “베트콩”파 조직자금 지원자로서 민단 구 동경본부 단장으로 반국가 활동 및 민단파괴공작을 주도하고 7·4공동성명 이후 조총련 동경본부 위원장 한O수와 연계 활동한자이고,

 

동 김종충, 조활준, 김은택, 김군부등 역시 조총련의 지령을 받아 재일 거류민단조직을 파괴하고 북괴선전 활동을 하다가 그 정체가 탄로되어 1971년 7월경 민단에서 축출된 소위 “베트콩파”등과 일원으로서 반국가활동을 주동하고 있을 뿐만아니라 7·4공동성명 발표 이후에는 8·15광복절, 3·1절등 국경일 기념식과 신년하례행사등을 조총련과 공동 개최하는 자 등임을 확인하였음에도 동인 등을 주요 구성원으로 하기로 하고,

 

위 배동호, 김재화, 곽동의, 정재준 등이 모금한 일화 1천7백40만엥이 조총련 등으로부터 염출된 불순한 자금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이를 제공받아 한민통을 결성하기로 하고,

 

그들이 운영하거나 관계하고 있는 민족시보는 위 배동호가 의장인 민족통일협의회의 기관지로서 “조국통일의 전망” 이라는 제하에 “김일성 수상은 독재자 박○○가 허수아비에 불과하다는 것을 갈 알았을 것이다” 등을 운운하여 북괴를 선전하고 “개정된 북괴헌법 전문” 게재 등의 방법으로 북괴 정치노선을 선전 찬양하며 한국의 6·23외교선언을 비난하고 “남북 분단 고정화에 절대 반대”라는 북괴노선을 지지하고 “고려연방 공화국으로”라는 제하에 김일성 사진과 연설내용을 일면에 기재하는 등 북괴정책 선전등으로 북괴 및 조총련의 활동을 비호하고 이들의 선전, 선동에 동조하는 한편, 민단활동과 대한민국정부시책을 극렬히 비판하는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는 사실로 보아 반국가단체의 활동에 동조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위 민족시보를 한민통의 기관지로 채택할 것을 결의하고,

 

1973년7월13일 14:00경 동경 소재 프라자호텔에서 위 배동호, 김재화, 조활준, 김종충, 김군부 등 “베트콩파” 6개단체 대표와 회합하여 동인들에게 “지난 7.6. 미국 “워싱톤”에서 교포 안OO, 임OO, 김OO 등과 함께 한민통 미국본부 발기 위원회를 결성하였다” “현재와 같은 당신들의 분산된 조직으로써는 소기의 목적달성에 효과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일본에도 한민통을 만들어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회복시키고 조국의 자주적 평화동일을 이룩하자”라는 등으로 한민통 결성의 필요성과 취지를 설명하고 동인들과 한민통을 결성할 것을 합의한 후,

 

동년 8. 4. 10:00경 동경 “파레스”호텔에서 위 배동호, 김재화, 조활준, 김종충 등과 재차 회합하여 동월 13. 한민통의 발기대회를 열고, 동월 15. 10:00 동경 “히비야”공회당에서 동 선언대회를 8. 15광복절 경축행사와 겸하여 개최할 것과 피고인이 동 대회에 참석하여 연설을 하고 한민통의 결성을 선언하기로 하는 한편, 한민통의 강령을,

 

○ 팟쇼적인 일인체제를 분쇄하고 민주헌정질서를 회복한다. 

○ 경제의 대의의존성을 지양하고 민족경제의 자주적 발전을 도모한다. 

○ 비동맹 다원외교를 실시하여 국위선양과 세계평화에 기여한다. 

○ 한반도를 중립화하고 남북 연방제에 의한 점진적 통일을 실현한다.

 

등으로 정하고, 의장에는 피고인 김대중을, 부의장에는 김재화, 정OO, 김OO을 상임고문에는 배동호를, 고문에는 양OO, 김OO, 유OO을, 사무총장에는 조활준을, 조직국장에는 곽동의를, 국제국장에는 김종충을 각 취임시키기로 확정하고,

 

1973. 8. 초순경 일본에서 귀국한 후 동년 8. 14. 10:00경 자가에서 위 김종충으로부터 국제전화로 “한민통 발기선언대회가 예정대로 1973. 8. 13 개최되어 한민통이 결성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1974. 2. 초순경 위 김종충의 부탁으로 자가를 방문한 일본 엔티브이(N.T.V)기자 나카무라(中村)로부터 “한민통 발기 대회에서 김선생님이 한민통 의장으로 추대되었다”는 연락을 받는 한편, 피고인은 하바드 대학 유학 준비가 예정대로 진행되는지 여부를 묻는 그에게 “현재의 형편으로는 출국이 어려울 것 같다고 전하라”고 응답하고, 1974.12. 초순경 자가에서 위 김종충으로부터 국제전화로 “미하원에서 김형에 대한 인권회복조치를 취할 때까지 한국에 대한 군원 2,000만불의 지출을 보류하기로 결정하였다는 보도가 있다”는 연락을 받고, 1974.12. 하순 자가에서 위 김종충으로부터 국제전화로 “이제 외출이 자유스러울 것이니 전보다 더욱 유의하라”는 내용의 연락을 받는 등 월평균 2-3회씩 김종충과 한민통의 활동상황 및 피고인의 신변안전등에 관하여 연락을 해 오던 중, 고인을 방문한 통일당 소속 국회의원 상 피고인 김녹영에게 한민통 국제국장인 등 김종충의 전화번호를 “메모” 용지에 적어 주면서 “김의원이 일본에 가면 김종충을 만나 내가 계속 한민통 의장으로 있는 것은 책임문제가 있으니, 해제하여 달라”고 부탁한 후, 동년 8. 중순경 귀국 인사차 자가를 방문한 위 김녹영으로부터 “한민통 의장문제는 현재 김선생에 대한 구출대책위원회의 일도 있고 지금 의장을 그만두면 한민통 활동이 어려워지므로 김성생의 의장직을 유지시키면서 모든 것을 김종충이가 맡아서 처리 하겠다고 합디다”라는 말을 전해듣는 등 한민통의 활동계획에 대한 보고를 받고, 

 

나. 1976. 3. 초 일자미상경 자가에서 위 김종충으로부터 전화로 3.1 명동성당사건으로 9명이 연행되었고 김형도 연행될 것이라고 신문에 보도되었는데 우리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해서 연행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내용의 한민통 활동계획에 대한 보고를 받고,

 

다. 1978. 12. 28 자가에서 한민통 상임고문 공소외 배동호, 동 부의장등 정재준 및 위 김종충 등으로부터 전화를 통하여 “형집행정지로 출소하게 된 것은 선생자신이 투쟁한 결과입니다. 사건의 진상규명과 원상회복을 위하여 계속 노력하겠읍니다”라는 내용의 한민통 활동계획을 보고받고, 동인들에게 “3년 가까운 옥살이를 고생으로 생각한적이 없읍니다. 이번 조치는 국내의 양식있는 사람들이 싸워준 결과로 압니다”라고 응답하고, 

 

라. 1980. 3. 중순 일자미상 14:00경 자가를 방문한 일본 시사통신기자 “나카누마”로부터 “한민통에서는 지난 1978. 6. 대법원에서 한민통을 반국가단체로 판시함으로써 김선생의 정치활동을 하는데 지장이 있을 것 같아 걱정이 되어, 다음 한민통 의장단 개편시에는 김재화를 의장으로 추대하겠다고 합디다”라는 말을 듣고 동인에게 “본인이 국내에서 정치활동을 하는데 현재 여건상 한민통 의장직에 계속 있는 것은 불리하니 조치해 달라”고 전해줄 것을 부탁하는 등 한민통의 활동계획에 관하여 연락함으로써, 반국가단체의 수괴가 되어 동 단체의 이익이 된다는 점을 알면서 그 구성원과 각 통신연락하고,

 

2. 가. 1979. 8. 초순경 위 자가에서 위 김녹영을 통하여 친북괴 일본 중의원 우쯔노미야도쿠마로부터 대의지급수단인 일화 200,000엥을 교부받고,

 

나. 1980. 4. 초순경 자가에서 미국인 에드워드 베이크를 통하여 미국 메릴란드주 거주 피고인의 처남 이OO로부터 대외지급수단인 미화 10,000불을 교부받아, 이를 각 취득한 후 그때부터 10일 이내에 한국은행, 외국환 은행, 환전상, 외국환 평형기금 기타 정부기관 또는 금융기관에 매각하지 아니하여 거주자의 외화매각 집중의무를 각 위반하고, 

 

3. 1973. 8.13. 귀국 후 반정부 투쟁을 강화하여 오다가 1976. 3. 1. 현실비판세력인 상 피고인 문OO, 동 이OO, 동 서OO 및 공소외 윤OO, 동 함OO 등과 야합하여 명동성당에서 “정부를 축출하기 위하여는 온 국민이 3·1운동과 4·19에 쳐들었던 횃불을 다시 쳐들어야 한다”는 등 내용의 소위 “민주구국 선언문”을 발표하여 그 사건으로 1977.3.23. 대법원에서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78.12.27. 형행정지결정으로 석방되고, 기회만 있으면 정부를 비판하여 국민들에게 대정부 불신감을 조장하여 반정부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1979.3.4. 명동사건 관련자들을 중심으로 재야 정치인, 종교인, 해직교수, 제적학생등 반정부 투쟁의식이 강한 자들을 규합하여 기존의 민주주의국민연합을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이하 “국민연합”이라 약칭함)으로 개편조직하고 동 연합 공동의장에 취임하여 시국선언 등을 통하여 모든 민주세력은 민주회복과 사회정의실현을 위하여 일어서야 한다고 선동하면서 반정부투쟁을 하여 오다가 10·26사태가 발생하여 정국이 불안하여지자 민주회복을 구실로 자신이 정권을 획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으로 판단하고 정권장악 기반구축의 일환으로서, 사조직으로 상피고인 예OO 및 공소외 박OO이 이끄는 비서실, 위 이OO이 주도하는 정책연구실을 두고, 동 연구실장인 이OO에게 동인의 월급 및 운영비조로 금 8,000,000원을 지급하고, 자신의 장남 김홍일로 하여금 1980.3.18 공소외 송OO, 권OO, 배OO등을 간부로 하는 청년비밀결사인 “민주연합 청년 동지회”를 조직하게 하고, 운영비조로 금 1,500,000원을 지급하고, 동년 3.중순경 상피고인 김상현으로 하여금 청년 정치지망생을 규합하여 “한국정치문화 연구소”를 조직하게 하고 그 운영비조로 수회에 걸쳐 금1,500,000원을 지급하고, 동년1.경 위 예OO로 하여금 이미 조직되어있던 “민주헌정동지회”의 조직을 개편, 위 예OO, 동 김OO, 동 김OO 등을 공동대표로 하여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 정비하고, 김OO에게 그 운영비조로 2회에 걸쳐 금5,500,000원을 지급하는 한편,정치활동의 전제인 복권실현을 위하여, 동년2.초 신민당내 자신의 지지자인 국회의원 박OO, 동 이OO 및 신민당 부총재의 공소외 조OO 등으로 하여금 신민당내 복권투쟁 위원회를 구성, 복권투쟁을 하게하고, 동월 29. 복권이 이루어지자, 동년 3.초부터 신민당에 복귀하여 동당의 차기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기 위하여 당권쟁취에 주력하기로 하고, 동 예OO에게 금10,000,000원, 전시 이OO에게 금 5,000,000원을 주어 신민당 국회의원과 77개 지구당 위원장들에 대한 성분분석 및 포섭공작을 하게하는 등 원내외의 지지세력 확충에 진력하는 한편, 동년 2.20.10:00경 위 자가에서 자신의 심복 사조직원인 부산 거주 공소외 노OO의 안내로 자가를 방문한, 부산대학생 동 조OO, 동 정OO, 동 이OO, 동 신OO, 동 이OO 등과 만나 노OO로부터 “이들은 부마사태를 주도한 부산대학생 들이다”라고 소개를 받고 동인들에게“부마사태는 학생, 시민들의 영웅적인 거사이며, 10·26사태는 부마사태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났다. 한국역사에 있어서 3대 민중운동을 꼽는다면 동학혁명, 4·19의거, 10.16 부마사태이다”라고 말하며 “행동하는 양심 김대중”이라고 새겨진 볼펜, 사진, 책자를 준후 기념촬영을 하는 등 정치적 세력확장 활동을 하여 오던 중,

 

가. 동월 20.18:00경 자가에서 상피고인 이OO, 동 한OO, 공소외 정OO, 동 양OO, 동 김OO 등 문인 20여명과 회합, 동인 등에게 “나는 민주주의를 위해 죽을 때까지 투쟁할 각오로 있는데 문인들도 글만 쓸 것이 아니라 프랑스의 ”앙드레 말로“가 제 5공화국 ”드골“정권을 지지하고 입각하여 정치활동을 하였듯이 우리나라 문인들도 정치에 적극 참여해달라” 고 권유하고,

 

나. 동년 3.1.복권을 맞이하자 상 피고인 한OO의 협조를 얻어 “7년만에 국민 여러분을 대하면서” 제하의 성명서를 작성한 후 자가에서 기자들에게 동 발표를 통하여 “유신체제의 주역들이 국민과 역사 앞에 반성하고 자숙하는 겸허한 태도를 조금도 보이지 않고 그들은 오히려 과거를 합리화시켜 기득권을 계속 유지시키는 일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심지어는 그들이 계속 집권하지 않으면 중대사태가 발생할 것이라고 국민여러분을 협박하기에 이르렀다” “민주발전을 저해하는 세력이 아직도 있다고 볼 때 우리들은 힘을 합쳐 그들의 기도를 봉쇄하여야 한다” “80년대는 국민여러분이 참으로 나라의 주인이 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나의 모든 것을 기꺼이 바칠 것을 다시한번 다짐하는 바이다.”라는 등 국민을 선동, 반정부의식을 고취하는 등 각 허가 없이 정치적 집회를 하고, 

 

4. 1980.3.21.21:00경 자가에서 전화로 상 피고인 고OO에게 “오는 3.26. 와이·더블유·씨·에이(Y.W.C.A) 수요강좌시간에 ”민족혼“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게 되었으니 우리나라 민족혼 개념에 대한 원고를 작성해달라”고 요청하여 다음날인 3.22.10:00경 자가에서 동 고OO로부터 “민족혼은 전투적, 적극적 의거의 경험에서 과시된다. 억압자와 싸워야 한다. 침략자와 싸워야 한다. 모순과 싸워야 한다”는 등 내용의 강연 원고를 수교 받음과 동시에“중앙대학에 영향력 있는 인재 하나가 저의 후배로서 믿음직스러운 사람이 있읍니다. 저의 문단 후배로서 이번에 복학하여 학내에서 영향력이 있고, 최근에는 총장사퇴 요구를 주장하고 있으며 장차 학원사태를 유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입니다.” 라는 말을 듣고 동인에게 “나는 고선생을 믿으니 고선생이 나를 위해 책임지고 수고해 주시오”라고 하면서 금 500,000원을 제공하고 동 고OO로 하여금 상 피고인 송OO에게 전달하고 문교부 요직을 약속하게 하여 데모를 선동하고,

 

동월 26.19:05경 서울 중구 명동 1가 1 와이·더블유·씨·에이(YWCA)에서 정기 수요강좌를 통해 “민주주의 나무는 국민의 피를 먹고 자란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피와 땀과 눈물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말은 결코 하나의 슬로건이 아니라 진실한것이다”라는 내용의 강연을 하는 등 반정부 투쟁을 하는 과정에서 정권장악을 위한 방법을 구상함에 있어서 신민당내 지지기반 확보를 위해 동 예OO와 신민당국회의원 이OO 등 자파의원들을 총 동원하고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여 신민당원내세력 및 전당대회 대위원 포섭에 주력하였으나 대통령후보지명을 위한 김영삼과의 표 대결시 열세를 면할 수가 없고, 한편 동년 3.중순경부터는 신현확국무총리의 유신비호발언 정부의 이원집정부제 구상설, 계엄의 장기화등 과도정부가 기득권을 이용, 정권을 계속 유지하려는 것으로 전망,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정권장악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여 동년 4.7.신민당 입당을 포기하고 민주화운동을 구실로 국민연합과 동 연합의 조종을 받는 복학생단체인 민주청년협의회(이하 “민청협” 이라 약칭함) 등 지지세력을 동원 학생시위를 폭력시위로 조종, 일반 국민을 가세시켜 폭력으로 국헌을 분란하여 정부를 전복할 목적으로,

 

가. 1980.4.10. 17시경 종로구 안국동 8의1 윤보선가에서 윤보선상 피고인 문OO, 동 예OO, 이OO, 고OO 공소외 심o권 등과 회합하여 동월 7. 기자회견을 통하여 발표한 신민당 입당 포기선언의 동기를 설명함에 있어 “작금의 국내정국추세는 3.11 신현확 총리가 일본 산께이신문 기자와의 회견을 통해 유신체제를 비호한데 이어 지난 3.15. 최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통해 정부의 이원집정부제구상을 간접적으로 시사한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앞으로의 정국이 매우 불투명하므로 이같은 상황하에서는 무엇보다 계엄의 조속해제, 유신잔당제거, 정부 개헌심의기구 해체, 정치일정단축, 구속자석방‧복권 등을 위한 투쟁이 선행되어야 함에도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재야인사를 영입함에 있어 문호 개방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시국관에 있어서도 안일한 생각으로 나와의 견해차이가 있고 내가 더 이상 신민당입당문제로 당권파와 대립시 국민들에게 대통령후보에만 집착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결과가 되므로 신민당 입당을 포기하고 국민연합에 복귀하여 민주회복투쟁에 전념하기로 했다.“고 설명하자 윤보선은 피고인의 신민당입당포기선언에 대하여 성급한 처사라고 비판하였으나, 동 고OO등 참석자 전원이 피고인의 신민당입당포기 및 국민연합복귀를 환영하면서 국민연합 명의로 신민당 결별지지 및 국민연합 복귀 환영성명을 발표 하자고 합의하고, 

 

나. 동일 20:00경부터 종로구 평창동 131의 1 북악파크호텔 501호실에서 상피고인 문OO, 동 예OO, 동 이OO, 동 고OO, 동 김OO, 동 한OO상, 공소외 심o권등 10여명과 재차 회합하고 국민연합이 계엄령 해제, 정부주도개헌포기, 유신잔당퇴진, 정치일정단축, 구속자 석방·복권, 학원자유, 자유언론 실천 등“을 실현시키기 위한 투쟁진열을 정비, 강화하기 위하여 국민연합의 규약을 개정, 기구를 개편보강하고, 규약은 종전 3인 공동의장단중심제로 운영하던 것을 중앙상임 위원회 중심제, 집행위원회를 중앙위원회로, 소위원회를 상임위원회로, 각각 변경, 보완하고 이에 따라 임원구성은, 중앙상임위원장에 위 문OO, 동 부위원장에 공소 외 함OO, 위 고OO, 중앙상임위원에 동 예OO, 동 이OO, 공소외 계OO, 동 김OO 등을 각 선임, 위 문OO을 중심으로 하여 자신이 용이하게 국민연합을 조종할 수 있도록 대폭 개편하고, 국민연합의 조직확대 및 본격적인 투쟁전개를 위해 서무·기획·인사·자금을 담당할 총무국과, 기간조직관리 및 재야, 종교, 학원등 특수조직활동을 담당할 조직국 및 각종 성명입안, 제반 선전업무를 담당할 홍보국을 증편하여, 과거 투쟁경력이 풍부하고 현재 각 대학 학생지도부와 연계하여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복학생 이OO를 총무국장에, 장OO를 조직국장에, 심O권을 홍보국장에 각 임명하기로 결정하는 동시, 이들 3인에게 학원 시위 선동임무로 부여하고 동 활동비조로 매월 금 200,000원씩 지급하기로 합의한 후, 위 참석자들에게 ”작금의 국내 정치정세를 분석하여 볼때, 나로서는 신민당내 당권파의 강력한 반발로 지지기반 확장이 어렵고, 군부의 지지기반이 없고, 동월 11. 신총리와 동월 15. 최대통령의 발언 등을 종합해 볼 때 선거로써는 차기 대통령에 당선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의로 판단되고 이번 기회를 놓치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영원히 바라볼 수 없으므로 정당활동 보다는 국민연합을 위시한 민주헌정동지회, 한국정치문화연구소 등의 조직을 확대 강화하면서 민주화 운동을 내세워 학생시위 분위기가 고조되면, 교외로 유도하여 시민의 호응을 촉구하고 아울러 우리조직을 가세시켜 대대적인 본격적 시위를 전개하면 현정부는 궁지에 몰려 우리의 민주화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으니 우선 조직을 통하여 전국적 여론을 환기시켜야 한다”고 하여 반정부 투쟁의식을 고취하고,

 

다. 1980.4.11.14:15 대전 가토릭농민회관에서 한국 카토릭농민회 중앙회 주최로 열린 강연회에서 “민주농정” 이란 제하의 강연을 함에 있어 “유신 체제하에서 신부, 목사, 재야인사가 감옥에 가서 국민의 인권, 농민의 권리를 위해 기도했기 때문에 10·26사태가 발생했다” “정치범을 즉각 석방하고, 복권시켜야 하며 김OO, 양OO 동지등이 감옥에 있는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는 등 내용의 강연을 하고,

 

1980.4.16.11:40경 도봉구 수유리 산129 한국신학대학에서 “도덕정치의 구현”이란 제하의 강연을 함에 있어, 청중동원을 위하여 자신의 사조직인 한국정치문화연구소, 민주헌정동지회, 민주연합청년동지회원등으로 하여금 강연선전전단 100,000매를 대학가 및 시내 중심지에 살포하게 하여 30,000여명의 청중을 모아 옥외확성기를 설치하고, 상 피고인 김OO으로 하여금 정OO등 소위 박수부대를 동원하게 한 가운데 “박정권은 반대자를 억지로 빨갱이로 몰고 민주인사들을 나라사랑, 자유사랑한 죄로 공산당으로 만들었다. 특권층은 수억 혹은 수십억 원 이상의 호화주택에 살며, 기천만원짜리 비단잉어를 기르고 고래수염으로 이쑤시개를 한다. 독재하에서 감옥에 가고, 고문, 연금, 공민권 박탈을 당하고, 학원·직장에서 추방되었던 사람들이 새로운 민주정부의 횃불이 되고 중심이 되어야 마땅하다” 라고 하는 등 청중들에게 반정부 투쟁의식을 고취하고,

 

라. 동일 14:00경 강연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도봉구 수유동 소재 크리스챤아카데미 하우스에서 상 피고인 문OO, 동 예OO, 동 이OO, 동 고OO, 동 한OO, 동 김OO등과 회합하여 “한국민주제도 연구소”를 설립하여 자신의 사조직을 통할하고 집권목적을 위한 제반전략지휘본부로 활용하기로 합의하는등 집권준비를 위한 조직구성을 모의하고,

 

동일 17:30경 귀로에 기독교회관에 가서 동 예OO, 동 고OO, 동 문OO, 동 한OO, 동 김OO등과 같이 양심범 가족협의회회원 조OO 등 15명이 “유신잔당 물러가라” “비상계엄 즉각 해제하라” “와이.더블유.씨에이사건 관련자등 구속인사 석방하라” 는 등 요구조건을 내세워 농성하는 것을 보고 동 농성 주동자인 조OO 및 양심범 가족협의회 회장 박OO, 구속자 박OO의 처 김OO, 동 얀OO의 처 정OO에게 수고한다면서 악수를 나누고 동 고OO의 선창으로 일동이 “유신잔당 물러가라” “비상계엄 해제하라” “구속인사 석방하라” 등의 구호를 제창함으로써 불법적 농성을 고무하여 오다가, 

 

동년 4.18.15:35경 중구 필동 소재 동국대학에서 “4·19 혁명과 민족통일”이란 제하의 연설을 함에 있어, 동 예OO로 하여금 이OO, 이OO, 박O, 김OO ,박OO 등 국회의원을 동원하게 하고, 동 김OO으로 하여금 위 강연선전전단 약 10만매를 인쇄하여 각 대학 및 시청앞 지하도 등지에서 살포하게 하고, 확성기를 가설하게 하여 청중 50,000여명을 모아, “탄압을 받더라도 끈질기게 저항하면 10·26과 같은 사태가 올 수 있고, 안보와 경제가 중요하면 할수록 과도정부는 빨리 끝나야 하며, 계엄령을 더 이상 존속시킬 필요가 없다. 10·26사태는 어떤 단체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도 아니며, 독재에 항거해온 전 국민의 혁명이다.” 라고 강연하여 반정부 투쟁의식을 고취하고,

 

마. 1980.4.초 09:00경 자가에서 상 피고인 김OO으로부터 “신민당의 폭력사태와 공화당의 역풍사태 분석” 및 “김대중 신민당 입당문제와 대응책”이라는 제목의 보고서에 관하여 “신민당의 폭력사태는 김영삼 총재의 지도역량이 부족한데 기인하므로 김대중 측에는 대체로 유리하고, 공화당의 역풍사태는 정치발전의 제동구실을 찾기 위한 유신잔당의 책동이 개입하였을 가능성이 크고, 김종필의 세력약화 및 정치일정 차질은 김대중에 불리하므로, 김대중은 과도정부가 노리는 허실의 노출을 억제하고 암암리에 조직강화, 자체세력확장에 주력하면서 종교계, 청년학생, 청년당원 등 행동하는 양심세력과 연계하여 정부에 대해 정치일정 약속이행, 계엄조속해제등의 투쟁을 ”디 데이(D-DAY)“ 를 정하여 일시에 범국민세로 궐기하면 정권을 장악할 수 있다는 설명을 듣고,

 

동 김OO에게 “과도정부는 명분없는 계엄을 계속 유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현확 총리의 유신비호 발언에 이어 최대통령의 이원집정부제구상등이 잇달아 나오는 점으로 보아 유신세력들이 정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 책동하는 것으로 의심되며 이를 분쇄하지 못하면 정권교체는 기대할 수 없고 민주회복도 바라볼 수 없을 것이니 국민들에게 방관하지 말고 일어날 수 있도록 촉진하기 위하여 시급히 조직을 강화하라”고 지시하는 등 “디 데이”를 정하여 사조직을 비롯한 종교계 청년학생들을 앞세워 일시에 범국민적 반정부 폭력시위를 유발하기로 합의하고, 동월 25.18:40경 중구 태평로1가 16의 1 코리아나호텔 그로리아룸에서 개최된 관훈클럽 초청연설을 통하여 기자 및 청중 250여명에게 “10·26 사태는 민중이 주체였던 동학혁명, 민족이 주체였던 3·1운동, 민주학생이 주체였던 4·19의거 등을 총괄적으로 계승한 민중, 민족, 민주의 국민적 의지의 집약적 표현이라 하겠고” “민족내에 내전은 아무리 무기로 승패를 겨룬다 해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정치전쟁이다. 즉 어느쪽이 더욱 자기편에 많은 국민의 지지를 획득할 수 있으며, 생명을 걸고 자기정부를 수호하려는 국민의 충성심을 더 많이 끌어들일 수 있느냐는 전쟁이다”는 등 내용의 발언을 하는 등 반정부 활동을 하는 한편, 1980년 3월~5월 사이에 동 한OO에게 금 1천2백50만원을 주어 1979년 12월8일자 「긴급조치 해제에 즈음하여」와 1980년 3월 1일자 「7년만에 국민여러분을 대하면서」 라는 제목의 2종의 성명서를 수록한 「이 땅에 새역사를 위하여」 라는 책 3만권, 명동사건 상고이유서 보충서를 수록한 「민주구국의 길」이라는 책 3만권, 동년 4월 25일자 관훈크럽 연설문을 수록한 「80년대의 좌표」라는 책 5천6백부를 각 출판하게하고, 각종 강연내용을 담은 카셋트 녹음테이프 5천권, 비데오테이프등을 제작하여 비서실, 민주연합청년동지회, 한국정치문화 연구소 등 사조직을 통하여 대학가와 전국 각지에 배포하여 반정부투쟁의식을 고취하고,

 

바. 동월 29일 8시경 충남 덕산에서 거행된 윤봉길의사추모제에서 동 예OO와 같이 참석, 기자회견을 통하여 소위 「민주화 촉진국민운동」을 전개하겠다고 선언하고,

 

동월 30일 15시~16시 자가에서 상 피고인 문OO, 동 이OO, 공소외 장OO, 동 심o권, 동 이OO 등과 회합하고 동 문OO으로부터 피고인의 위 덕산발언에서 제의한 민주화촉진국민운동추진문제와 관련하여 국민연합상임위원회를 열어 의견을 종합한 결과 「국민연합은 민주화에 관심을 가지는 정당, 단체와 협의할 의사가 있으며 국민연합을 주축으로 한 민주세력을 총 집결, 민주화투쟁을 더욱 가속화시키기로 채택하고 국민연합명의로 전시 덕산발언 지지성명을 발표하기로 결의하고 공동의장인 윤보선에게 동 의향을 제시하였다가 거부당하였으나 후퇴하지 아니하고 피고인의 의도에 따르기로 하였다」는 말을 듣고 동인들에게 「나는 민주회복을 위해 싸우는 모든 정당, 사회단체와 개인이 힘을 합하여 뜻을 이루는데 아무도 반대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였고 국민연합이 이를 주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되어 제안한 것이니 동 추진방안은 국민연합 중앙위원들과 확대회의를 열어 토의, 결정하자」고 제의하여 전원이 찬동을 얻어서 피고인의 복안대로 동 민주화촉진국민운동을 추진키로 합의하여 정부전복 계획을 구체화하고,

 

사. 1980년 5월 1일 18시경 자가에서 상피고인 문OO, 동 이OO, 동 예OO, 동 고OO, 동 한OO, 동 김OO, 공소외 장OO, 동 심o권, 동 김OO, 동 이OO, 동 이OO, 동 김OO, 동 박OO 등과 회합하여 학내소요를 계엄령해제, 정부주도개헌작업포기, 정치일정 단축, 유신잔당퇴진등 정치적 이슈로 전환하게 하고 교내시위를 교외시위로 유도, 시민을 이에 가세하도록 선동하여 폭력시위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면 현정부는 붕괴될 것이니 학원에 영향력이 있는 상피고인 조OO, 공소외 심O권, 동 장OO, 동 이OO 등 청년조직들이 학생선동에 더욱 주력할 것과, 그 결행시기는 5월 중순경으로 정하고, 피고인의 집권을 위한 제반전략지휘본부이며 정부전복후 과도내각역할을 할 「한국민주제도 연구소」가 빠른 시일내에 활동을 개시하도록 이사장에 위 예OO, 소장에 동 이OO을 각 선임하고, 자신이 미리 공소외 심o권을 시켜 준비한 「한국민주제도 연구소」 정관과 이사 취임 의뢰서 및 취임승락서를 각자에게 배포, 위 한OO을 제외한 참석자 전원이 동 이사직 취임을 승락하여 한국민주제도 연구소를 결성하고, 동 이OO에게 한국민주제도 연구소의 전문위원과 이를 보좌할 위원구성을 위임하여, 동 이OO은 전문위원으로서는 민족재생담당에 김OO, 역사문화담당에 백OO, 종교교육담당에 장OO, 노동담당에 탁OO, 농업담당에 유OO, 경제담당에 임OO, 안보외교담당에 양OO, 통일담당에 문OO, 도의정치담당에 안OO, 경제담당에 한OO, 행정담당에 이OO을 각 선임하고, 위 전문위원을 보좌할 자로서, 노동담당에 장OO, 농민담당에 황OO, 종교(천주교) 담당에 이OO, 종교(개신교) 담당에 서OO, 여성담당에 이OO, 학원담당에 김OO, 지역담당에 김OO 등을 선임하는 등 정부타도를 위한 폭력시위선동과 과도내각 역할의 조직을 구성하기로 합의하고,

 

아. 1980년 5월 1일 16시경 자가에서 민주헌정동지회 전남책 홍OO에게 전남지방의 조직이 예상외로 부진하니 동 조직활동을 적극화하라고 촉구하는 동시에 조직활동비조로 금30만원을 제공하여 동인으로 하여금 목포시 조직책에 안O을 포섭, 임명하게 하고, 여수, 순천, 광산, 화순, 나주, 정선, 고흥, 영광, 구례, 장흥 등 시군의 조직책을 포섭, 임명하게 하는 등 정권쟁취를 위한 조직기반을 확대하는 한편, 동월 3일 19시경 자가에서 상피고인 예OO와 회합하고 동인으로부터 국민연합 상임위원들이 국민연합명의로 계엄령 해제, 정부주도 개헌포기, 정치일정 단축 등을 요구하는 민주화촉진국민선언을 발표할 예정이다. 라는 말을 듣고 이를 찬양하면서 동 초안이 완성되면 같이 검토후 발표하기로 합의한 후, 동월 6일 15시경 자가에서 동 문OO, 동 예OO, 동 이OO등과 회합하여 동 문OO으로부터 국민연합이 민주화촉진국민운동을 가속화하기 위하여 선언문을 발표하고자 5월 7일자 국민연합명의의 민주화촉진국민선언문을 초안하였으니 서명을 하여 달라는 제의를 받고 동 초안을 검토한바 「갈수록 노골화 되어 가는 유신잔당의 독재연장책동을 그대로 내버려 둔채 어떻게 민주화가 가능하단 말인가, 국민의 함성속에서 독재자가 타도되었고 유신체제가 결정적인 파멸의 길로 들어선 오늘 더 이상 두려워할 무엇이 남아있단 말인가.」

 

「단호한 민중적 결단으로 철저하게 분쇄하지 않으면 안된다.」

 

「근로자, 청년학생들의 민주, 민권투쟁은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의 새시대 탄생시키는 최후의 진통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

 

「민족사의 결전장은 우리들 한사람 한사람의 단호한 시민적 행동을 통한 합류를 절실히 요청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합법적 근거도 정당한 명분도 이유도 없이 유신잔당 비호, 언론억압, 정치발전 방해를 위해 존재할뿐 불법불의의 비상계엄령은 즉각 해제되어야 한다.」

 

「유신체제를 미화찬양하고 유신정권에 의한 개헌주도를 공언하는 등 국민적 분노를 촉발시키고 있는 신현확 총리는 즉각 물러나야 한다.」

 

「김재규 재판에 대한 사법권 독립을 침해하고 노골적인 정치개입을 일삼는 보안사령관은 공직에서 물러나야 한다.」

 

「구속된 정치범, 양심범은 즉각 석방되어야하며 동일방직 해고 근로자, 동아투위, 조선투위 해고 언론인들은 전원 복직되어야 한다.」

 

「왜곡보도와 반민주적 논설로 유신잔당의 독재 연장음모에 협력하고 있는 일부언론, 방송, 기업인들은 이 순간부터 결연히 일어나 과감히 자유언론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민중과 역사의 편에 확고하게 서기를 촉구한다.」

 

「국민주권찬탈의 상징인 유정회,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자진 해체되어야한다.」

 

「국민주권찬탈 음모를 획책하고 있는 정부, 개헌 심의회는 해산되어야 하며 국민적 합의를 외면하고 이원집정부제, 중선거구제를 민의로 위장 선전하기 위한 정부 개헌공청회는 포기되어야 한다.」

 

「각정당. 사회단체는 더 이상 환상에 사로잡혀 현시국을 수수방관말고 전국적 투쟁에 결연히 합류하기를 촉구한다. 우리는 각계각층의 민주애국시민들과 모든 민주역량을 총집결하여 유신잔당의 음모를 단호히 분쇄하는 민주화운동을 과감히 전개할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

 

라고 되어 있어 자신의 의도와 부합되므로 이를 익일 발표하도록 지시하면서 서명하고, 상피고인 문OO, 동 이OO, 동 예OO, 공소외 심O권등은 동월 7일 종로구 연지동 소재 기독교 회관에서 뉴욕타임즈지 서울 특파원 심O훈 등 30여명의 내외신기자들을 모아 놓고 동 선언문을 발표하고,

 

1980년 5월 5일 18시경 자가에서 상 피고인 이OO으로부터 동인이 임의 초안하여 온 「시국수습과 민주화를 위한 범국민적 민주인사의 조직체 구성」이라는 제하의 「유신잔재 청산방안 및 시국대책에 관한 특별성명서」 초안을 받고 동 이OO의 설명을 통하여 동 내용은 「시국수습과 민주화를 위한 범국민적 민주인사의 조직체는 국민연합 공동의장 윤OO, 김대중, 함OO 및 지OO, 김OO 등 5명을 추대하고 운영은 문OO, 함OO, 고OO 등으로 하여금 집단지도체제로 한다」 「유신잔재 청산방안은, 유신헌법무효선언, 계엄 즉각 해제, 통일주체국민회의 해체, 유정회.공화당해산, 과도정부의 중립적 조직 내무, 국방, 법무교체, 6월내 개헌, 최대통령, 신총리, 전부장퇴진, 모든 정치범의 석방등으로 한다」 「시국수습과 민주화를 위한 범국민적 민주인사의 조직체발족에 즈음하여 김대중은 정부에 대하여 계엄령 조기해제, 개헌안을 6월내에 국민투표로 확정, 과도정부는 정치적 중립 성실성 유지, 57만 공무원의 직무충실, 북한공산집단의 한국사태 악용불용등의 성명을 발표한다」

 

등으로 설명하자 검토해보겠다고 동조하므로서 헌법을 무효선언하고 유신정권에 참여인사는 대거 숙정하여 국가원수의 퇴진을 주장하는 등 정부를 전복하기 위하여 모의하고,

 

자. 동월 5일 19시 50분경 자가에서 상 피고인 김OO과 회합, 동인으로부터 「전남대 복학생 정OO을 데리고 왔는데 동 정OO은 6.3 데모 시 반정부투쟁을 하다가 제적된 후 15년만에 복학한 학생이며 전남대 학생들의 폭력시위를 유발, 광주지방에 민중봉기를 일으키기 위하여 자금 5백만원을 지원을 요청하므로 도와주는 것이 좋겠다」는 제의를 받고 이를 승락, 동인에게 『지금은 3백만원밖에 없으니 이것을 주도록 하라』고 말하면서 『3백만원을 교교한 후 동 김OO을 시켜 응접실에 대기중이던 공소외 정OO을 내실로 불러들여 동인에게 동 김OO으로부터 구상내용을 들었는데 열심히 하라고 격려한 후 동 김OO을 통하여 동 자금 3백만원을 제공하고, 동월 8일 11시경 자가에서 동 김OO에게 나머지 돈 2백만원을 제공하여 동인으로 하여금 동일 18시경 한국정치문화연구소 사무실에서 위 정OO에게 전달케 하고,

 

차. 동월 7일 9시경 자가에서 장남 김홍일에게 신부, 목사, 교수 등에게 배포하기 위하여 관훈크럽 연설문인 「80년대의 좌표」 5천부를 제작하라고 지시하고 동 인쇄비조로 일금 15만원을 제공하여 동인으로 하여금 종로구 수송동 소재 임지문화사에서 동 책자 5천부를 제작한 후 이를 자가에 보관하면서 방문자들에게 배포하여 반정부 불신감을 조장하고,

 

동월 8일 20시 30분 경주 김유신장군추모 금산대제에 참석시 경주 역전에서 출영자 6백여명에게 인사말을 통하여 「10·26사태는 독재의 장벽에 조그마한 돌파구를 낸데 불과하다」 「지금 유신세력들은 온갖 방법으로 돌파구를 메우려 한다」 「우리는 두 번 다시 독재가 되지 않도록 민주주의를 이 기회에 이룩하자」 「민주주의의 성취 여부는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다」는 등 내용의 발언을 하여 반정부 투쟁의식을 조장하면서 궐기할 것을 촉구하고, 동월 10일경 자가에서 망 전태일의 oooo 전OO과 회합, 동인으로부터 인천 동일방직 해고 여공들이 여의도 소재 대한노총회관에서 복직요구 농성을 전개하고 있으니 농성자금을 보조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처 이희호로 하여금 금 20만원을 제공하게 하여 동 여공들의 불법적 농성을 고무하고,

 

동년 5월11일 10시55분-11시45분 전북 정읍 동학제 개최 장소에서 강연을 통하여 청중 5만여명에게 「10·26사태이후 조그마한 민주주의의 숨통이 터졌는데 그것을 막으려는 음모가 있다.」 「동학혁명은 처음부터 폭력주의가 아니라 상소를 하고 주의 주장을 건의하였으나 관철되지 않아 봉기한 것으로 오늘날의 민주주의와 마찬가지다」 「박정권 18년간의 가장 큰 과오가 신라통일 이후 지방색을 다시 불러일으킨 것이다」라고 연설하여 지역감정과 반정부봉기의식을 고취하는 등 활동하여 오다가,

 

동월 12일 17시경 위 북악파크 호텔 521호실에서 상 피고인 문OO, 동 예OO, 동 이OO, 동 한OO, 동 한OO, 동 김OO, 동 서OO, 동 이OO, 공소외 심o권, 동 장OO, 동 이OO, 동 계OO 등과 회합하여 시국에 관하여 전반적인 검토를 하던중, 위 장OO 및 심o권으로부터 전국 26개 대학의 학생회장단 45명이 동년 5월11일 15시경부터 5월12일 9시까지 서울대 학생회관에서 철야회의하여 「앞으로 잠정적으로 교내시위만을 한다. 휴교령 발동시는 단호한 투쟁을 전개한다. 계엄해제와 정치일정의 명백한 발표를 촉구한다. 학원사태해결을 위한 정부와의 대화를 위하여 국무총리 면담을 촉구한다」는 사항을 결의하였으며, 이어 동월 16일 전국대학 학생회장단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회의를 열어 새로운 투쟁방법을 협의하기로 하였는데 앞으로 학원시위가 점차 확산될것이 전망된다는 등 학원동향을 보고받고, 동인등에게 「과도정부의 실권을 잡고있는 유신잔당들이 민주화에 역행하여 정권을 계속 잡으려는 음모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민주화운동을 하자는 것은 반독재 민주회복을 실현하는데 그 목적이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반민주유신세력들의 음모를 분쇄한 다음 민주주의에 역행하여 온 독재정부를 무너뜨려 우리 민주인사들이 참여하는 민주정부를 수립하는데 있다」고 한 후 다시 위 장OO, 심o권에게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명문대학의 동정을 잘 살펴보라고 지시하는 한편, 위 장OO로부터 이는 지난 5월 8일 민청협 확대간부회의에서 결정한 것이라고 하면서 「각 대학은 일정한 날을 정하여, 동시에 각목과 화염병을 사용한 폭력시위를 과격하게 벌여 저지과정에서 예상되는 희생을 각오하고서, 민중의 호응을 얻어 정부중요관서를 점거하게 되면, 4·19와 같은 무정부 상태가 되는데 이를 계기로 민주세력의 구심인물인 동 김대중을 사태수습인물로 내세워 학생과 민중을 설득하면 정권을 장악이 가능하고 사후 수습으로서 민주제도 연구소를 주축으로 과도정부를 이끌면 차기정권까지 장악할 수 있다」고 전제하고 자신은 심o권과 같이 각 대학 학생회장단에 영향력이 있는 복학생들을 규합, 학생폭력시위를 주도하겠으니 동 이OO에게 과도체제구상을 미리 해두라고 제의를 받고 이에 찬동함으로써 폭력에 의한 정부전복을 결의하고,

 

카. 동년 5월 13일부터 동월 15일간에 서울시내 각지에서 학생시위사태가 발생하자 비서실 총무담당 차장 김OO, 경호담당 차장 박OO, 비서 한OO, 함OO, 권OO, 김OO, 이O, 김홍일 등을 서울시내 세종로, 시청, 보신각, 세종문화회관, 서울역등 요소에 파견하여 학생시위상황을 파악하도록 지시한 후 실황보고를 받고,

 

동월 10일 오후 자가에서 상 피고인 김녹영에게 「최근 학생들이 주장하고 있는 계엄령해제, 정치일정단축, 정부주도개헌포기, 구속자석방・복권, 언론검열 폐지등 요구는 현정부가 유신세력이 주축이 되어 계속 정권을 장악하고자 하므로 정치일정이 불투명하여 민주화가 쉽게 되리라고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이니 정당 등에서 학생들의 요구가 정당하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여 여론을 조성함이 바람직하다」고 하면서 금 50만원을 제공하고, 그로 하여금 동월 14일 「학생의 소리는 국민의 소리요, 민주의 소리다」라는 제목으로 학생들의 주장이 정당하며 정부는 그 주장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준엄한 역사의 심판을 면치못할 것임을 경고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게 하고, 다시 동월 15일 「난국 수습을 위한 비상시국대책회의 소집을 제의한다」는 제목으로 「확대일로에 있는 학원사태를 수습하고 정치일정에 대한 국민의 신뢰하고 납득할 수 있는 제시 등 즉각적인 수습대책을 위하여 국무총리, 계엄사령관, 공화당, 신민당, 통일당, 통일사회당의 대표, 불교계 대표, 기독교 대표, 천주교 대표, 국민연합공동의장단인 윤보선, 함OO, 김대중,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이화여대의 각 총장들로 시국수습대책회의를 구성하고 정부가 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대비하여 동월 20일 통일당 중앙상무위원회를 소집, 결의를 거쳐 중대행사에 돌입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게 함으로써 서울시내 각 대학생 수만명이 서울시청, 서울역 등 도심지에 집결하여 전개하고 있는 격렬한 가두폭력시위를 자극 격화하도록 조종하고,

 

동년 5월 15일 14시 자가에서 상 피고인 문OO, 동 예OO, 동 이OO, 동 서OO, 동 이OO 등과 회합하여 동 예OO, 동 이OO 등이 초안하여 온 국민연합명의의 민주화촉진 국민대회 선언문을 검토한 바,

 

5월 7일 민주화촉진 국민선언에서 요구한 「불법 불의한 비상계엄의 즉각해제」 「신현확 총리와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즉각퇴진」 「정치범의 전원 석방과 복권 및 부당하게 해고당한 근로자의 복직」 「언론의 자유보장」 「유정회, 통일주체국민회의와 정부 개헌심의위원회의 즉각 해체 등에 대하여 정부의 명확한 답변을 5월 19일 10시까지 국민 앞에 밝힐 것을 촉구하고」 위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때는 5월 19일 정오를 기해 아래와 같은 행동강령에 따라 우리 국민은 투쟁에 나설것을 선언하고,

 

행동 강령으로서 민주 애국시민은 유신체제를 종결짓는 민주화투쟁에 동참하는 의사의 표시로 검은 리봉을 가슴에 단다. 비상계엄령은 무효이므로 우리의 국군은 비상계엄령에 의거한 일체의 지시에 복종하지 말것이며, 언론은 검열과 통제를 거부할 것이며, 전 국민은 집회와 평화적 시위를 통한 민주화투쟁을 용감히 전개한다.

 

정당, 사회단체, 종교단체, 근로자, 농민, 학생, 공무원, 중소상인, 민주애국시민들은 5월20일 정오에 서울은 장충공원에서, 지방은 시청앞광장에서 민주화촉진국민대회를 개최한다는등 내용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고 피고인은 동행동 강령중 우리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때는 국민연합은 5월 22일부터 국민과 더불어 우리의 요구를 관철하는 민주화 투쟁을 전개할 것이며, 이 경우에 파생되는 모든 책임은 정부당국에 있음을 경고해 두는 바이다 라고 수정 성안하고 서명후 이를 발표하도록 하여, 동 문OO이 위 심o권을 시켜 동 선언문 30부를 복제하여 1980년 5월 16일 각 신문방송기관과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이화여대, 성균관대등 학교에 배포함으로써 학생들의 폭력시위를 절정에 달하도록 조종하고,

 

타. 80년 5월 17일 8시-10시간 위 북악파크호텔 521호실에서 상피고인 문OO, 동 예OO, 동 고OO, 동 이OO, 동 서OO, 동 한OO, 등과 회합하여 동 문OO으로부터 제2국민선언문을 5월 16일 발표하였다는 말을 듣고 이를 확인한 후 동 회합참석자들에게 민주화촉진 국민운동본부를 시급히 결성하자고 강조하면서 어제(5.16) 귀국한 최규하 대통령이 시국대책에 관한 발표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니 동 조치가 발표될때까지 일시 관망만 하였다가 계속 불투명할 시는 제2국민선언문에서 예고한 바와 같이 전국민적봉기를 실행하자고 결의하는 등

 

내란을 음모, 선동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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